오피니언 중앙시평

내신은 정답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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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부가 올해 입시부터 고교 내신성적을 50%까지 반영하라고 대학을 윽박지르더니, 최근에는 한발 물러나 대학의 자발적인(?) 협력을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정부당국자들은 내신 반영률만 높이면 학생들이 학원에 가지 않고 학교교육도 정상화될 수 있을 텐데 대학들이 그까짓 수능점수 몇 점 높은 학생을 선발하려고 교육정상화라는 시대적 현안과 교육의 기회균등(?)이라는 ‘사회적 책무성’을 팽개쳐버리고 있다고 비난해 왔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내신 반영률을 높이면 옛날처럼 학교에서 치맛바람이 거세지고 내신을 둘러싼 온갖 부정이 성행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일단 접어 두자. 그러나 학교교육이 정상화되거나 사교육이 줄어들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내신 성적은 대체로 고교 3년 동안의 중간과 기말고사 등 12번에 걸쳐 치러지는 시험 성적을 통해 산출된다. 내신은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아이들 말대로 ‘친구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며, 내신의 비중이 커질수록 학생들은 더욱 치열한 내신 경쟁에 시달리고 점수 벌레가 되어 갈 것이다.

 사교육비는 줄어들 수 있을까? 어느 유명 학원 강사에 의하면 3~5년 동안 선생님이 출제한 문제를 분석해 보면 이번에는 어떤 시험문제가 출제될지 손바닥 들여다 보듯 쉽게 알 수 있다고 한다. 학원에서는 소위 ‘기출문제 족보’를 만들어 가르칠 것이고, 다급한 학생들은 학원으로 몰려갈 것이다.

 내신 성적 비율을 높이라고 요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서울의 강북 지역이나 농어촌 지역의 학생들도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면 강남 지역이나 외고 학생 못지않게 좋은 대학에 입학할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이것은 참여정부의 일관된 정책 방향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학교 간의 실력 차이는 매우 크다. 며칠 전 중앙일보 보도에 의하면 일반고 내신 1등급이 수능 3등급이고, 특목고 내신 5등급이 수능 1등급이라고 한다. 똑같은 서울이라고 해도 강남 지역과 강북 지역 학생 사이에도 차이가 많다. 내신 성적을 똑같이 취급하게 되면 실력이 좋은 학생은 떨어지고, 실력이 나쁜 학생이 합격하게 된다.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고자 하는 대학들로서도 이러한 제도를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대학들이 정부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신의 비중을 높이되, 학교별로 고등학교의 내신 성적을 차별화해서 반영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학교교육의 정상화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간절한 소망이다. 그러나 대학입시에서 내신 반영률을 높인다고 해서 학교교육이 정상화되지는 않는다. 대학 입시는 고등학교의 교육과정, 특성화된 교육프로그램, 전국 단위의 학력검사, 다양한 학교 형태, 단위 학교의 자율성 등 여러 교육 문제와 연계해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계획을 세워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접근해 가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정부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대학입시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 바란다. 대신 온 국민의 지혜를 모아 학교교육의 정상화와 대학의 적격자 선발이라는 대학입시의 서로 상충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장기적인 방안을 마련해 가야 한다. 이러한 제도 가운데 하나가 고교와 대학·학부형·교원단체·교육전문가·기업체 등 각계각층으로 구성된 ‘교육발전협의회’였지만, 불행히도 이를 추진했던 안병영 전 부총리가 물러나면서 이 기구도 없어졌다. 2004년 구성된 이 협의회가 활발하게 운영됐더라면 최소한 오늘과 같은 정부-대학 간 갈등은 없었을 것이다. 뒤늦게라도 교육부가 비슷한 기구를 다시 만들어 입시 문제를 접근해 가겠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정부가 대학입시를 통제하는 어용 기구로 만들 생각을 갖고 이를 추진해 간다면, 지금보다 더욱 거센 국민적 저항에 부닥칠 것이다.

정진곤 한양대 교수 교육학

◆약력: 서울대 교육학과, 미 일리노이대 철학박사,서울교육발전협의회 공동위원장, 전 한국교육정책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