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부도난 성탄선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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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선물이라더니, 정작 가족들과는 연락조차 못 한다니 말이 됩니까."

북한에 억류됐다가 50년 만에 극적으로 귀환한 국군포로 전용일(71)씨의 동생 수일씨를 비롯한 가족들은 25일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정부가 전날 중국에서 입국한 全씨에게 가족과의 상봉은 물론 전화 접촉조차 못하게 통제했기 때문이다.

全씨의 조카 준옥씨가 전화로 항의하자 서울 대방동의 대성공사(군 정보기관이 운영하는 합동신문시설) 관계자는 "크리스마스 휴일이니 내일 사장님(현역 장성)이 나와봐야 안다"고 말했다. 결국 全씨는 썰렁한 고국 도착 첫날밤과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정부는 보안을 이유로 전씨의 입국 사실도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 동생 수일씨는 "공항에 나가 손이라도 잡아주고 꽃다발이라도 안겨주려 했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고향인 경북 영천에서 TV를 지켜봐야 했던 가족들은 행여 全씨에게서 연락이 올까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허사였다.

외교부가 全씨 조기송환을 이룬 외교교섭 성과를 홍보하고, 국방부는 '4억원 보상금에 면역식 거행'을 브리핑했지만 주인공 全씨는 정작 꿈에 그리던 가족과의 만남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한 민간단체 관계자는 "전씨를 홀대해 강제북송 위기로 내몰았던 정부가 이젠 대통령까지 나서 '크리스마스 선물' 운운하며 자랑하기에 바쁘다"고 꼬집었다.

물론 관계당국은 3주간의 조사기간 등 규정을 지켜야 하는 나름의 고충을 토로한다. 하지만 위장귀순 여부 등을 가려내야 하는 탈북자가 아닌 국군포로는 융통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선을 넘어 반세기 만에 돌아온 칠순의 노병(老兵)에겐 떠들썩한 환영행사보다 가족들과의 따뜻한 만남이 절실할 것이다.

이영종 통일외교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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