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박스 자체를 인도하라(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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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14일 우리 정부에 인도한 KAL기 격추사건에 관한 자료는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에는 미흡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에 인도된 자료는 비교적 다양하나 진상의 핵을 담은 부분이 빠져있다. 더구나 KAL기 격추의 마지막 30분에 관한 녹음자료가 부실해 자료의 제공과 정중한 인도절차 등 러시아정부가 보여준 성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의표시를 유보할 수 밖에 없다.
KAL기사건에 관한 자료문제가 말끔히 해결되기 위해서는 KAL기의 블랙박스와 당시 소련군 출동부대의 관계자료 일체를 우리측에 건네야 한다. 블랙박스는 비록 소련령에서 소련이 건져냈다고 하나 명백히 대한항공의 재산이다. 따라서 그것은 원형 그대로 돌려보내야 한다. 소련군부대 자료는 러시아의 소유이므로 사본이라도 좋다.
우리 대표단이 블랙박스 자체를 요구하자 옐친대통령은 이미 해체됐다고 해명했다. 그렇다면 러시아측은 해체를 입증할만한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고 납득할만한 사과를 해야 한다. 블랙박스 자체를 돌려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러시아정부가 틀림없이 보관하고 있을 블랙박스 수록 녹음테이프를 원형대로 우리측에 인도해야 할 것이다.
옐친대통령은 노태우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러시아정부의 자료인도결정은 「인도주의에 입각한 것」이며 소련정부는 KAL기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것을 「신성한 의무」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흡한 자료의 보완방법은 이런 옐친대통령 발언에 입각해 성실히 이뤄지길 기대한다.
KAL기 격추는 구소련 치하에서 일어났고 그후 구소련은 해체됐다. 지금의 러시아는 소연방을 구성하고 있던 한 공화국이었으므로 민간 여객기인 KAL기 격추 자체에 대한 비판을 받을 대상은 아니다. 따라서 러시아정부는 진상을 밝히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KAL기 격추는 여러 국가가 관련돼 있고 인명·재산의 피해가 클 뿐만 아니라 인도주의 원칙이나 국제적인 규약에도 어긋나는 만행이었다. 따라서 소연방의 정통성을 잇고 있는 지금의 러시아정부는 자료의 인도만으로 문제가 끝난 것이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우선 자료를 토대로 하여 KAL기 추락의 진상을 정확히 밝혀내고 이에 따라 책임소재를 가려야 한다. 책임소재가 규명되면 거기에 따른 사과와 배상,그리고 그런 사태의 재발방지를 위한 조치와 다짐이 뒤따라야 한다.
이것은 새로 출발한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건전하게 발전시키는 기초일뿐 아니라 신생 러시아가 국제사회에서 떳떳하게 존재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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