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연속극 열풍/구소 전역 “들썩”(지구촌화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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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8년전 TV연애극 『부자도 운다』 수입방송/주민은 물론 군인도 열광/“펴지지 않는 생활… 정치염증 반작용”
18년전 만들어진 멕시코의 멜러드라마가 구소련지역 사람들을 TV 앞에 붙잡아 놓고 있다. 구소련은 15개 국가로 나뉘었지만 일일연속극 『부자도 운다』가 방송되는 시간이면 모두 하나가 된다.
지난해 말부터 오스탄키노 TV(구소비예트TV 제1채널)의 전파를 타기 시작한 이 드라마가 70여년간 공산통치하에서 대중문화에 굶주렸던 구소련인들을 열광시키고 있는 것이다.
현재 구소련 지역에서 시청률이 가장 높은 프로그램으로 전체 시청자의 절반이 이 드라마를 꼬박꼬박 보고 있으며 여기에 13%는 「자주」,15%는 「가끔」본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있다.
이 시리즈가 방송되는 시간이면 신생독립국가 민족분쟁 현장의 병사들도 총을 놓고 TV 앞에 앉으며 강도도 줄어들고 들판에선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일손을 놓기 때문에 수도물 사용량이 줄어 생활급수관 수압이 올라간다. 한 신문은 방송시간중 아이들을 돌보지 않은채 방치하기 때문에 어린이 치사율이 올라갔다고 보도한바도 있다.
키르기스의 콘스탄티노브카 집단농장 지배인은 『부자도 운다』가 방송되는 아침시간대에 노동자 아파트에 단전을 실시했다. 집단결근을 막기 위해 아예 TV를 시청하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다.
2주전 주인공 마리아나역의 여배우 베로니카 카스트로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때 신문들은 일제히 「마리아나 모스크바 도착」을 1면 머릿기사로 올렸다. 그녀가 모스크바시내 볼쇼이극장을 찾았을 때는 수천명이 몰려들어 사인을 부탁하는 바람에 이 극장의 간판격 발레인 『백조의 호수』공연이 지연되기도 했다.
『부자도 운다』는 멕시코 중년부부의 사랑얘기를 감상적으로 그린 45분짜리 2백49회분의 통속 연속드라마다.
특별할게 없는 내용의 이 드라마가 뒤늦게 구소련 지역에서 공전의 히트를 하고 있는데 대해 원인분석이 분분하다. 지난 89년 5월 갓 출범한 민주적 인민대의원 대회의 TV생중계가 소련인들의 시선을 붙들어 맸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부자도 운다』인기의 주요인으로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염증을 지적한다.
『당시 TV생중계를 기대를 갖고 주시했었으나 이후 아무것도 변한게 없다. 생활은 오히려 나빠졌다. 이젠 TV에 정치인이 등장하면 채널을 돌려버린다.』 한 모스크바 주부의 말이다.
TV극중에서 드러나는 러시아 등 구소련권과는 다른 「문화적」생활방식도 인기의 한 요소로 지적되고 있다. 경리사원인 옐레나 포포바는 『러시아에서는 여자들이 모든 걸 해내야 하지만 멕시코에서는 남자가 여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긴다』면서 서방의 평등한 남녀관계를 부러워했다.
전통적으로 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 등 문호들의 고전을 즐겨 읽는다는 러시아인들이 신파조 TV연속극에 매달리는 현상에 대해 한 전문가는 이 프로가 일종의 「심리요법」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문학평론가 타치아나 홀로 피랸키나는 『드라마를 본후 침을 맞거나 최면술에 걸린 것과 같이 숨겨진 신체적 잠재력이 자극받는 효과를 얻는다』며 실제 스트레스를 인위적 긴장으로 대치해 시청자의 현실도피 심리에 부합하는 점』을 히트요인으로 꼽는다. 이 연속극은 매회 예상 밖의 사건이 전개되는 식이어서 시청자의 궁금증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모스크바 지하철역에서는 집시 점쟁이들이 다음회 내용을 「예언」해주고 쏠쏠히 수입을 올리는 일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곽한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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