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유전쟁] 22. 한국상업은행 입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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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휴학과 복학을 거듭하며 겨우 3학년을 수료했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서울대는 부산으로 내려가 수업을 계속했다. 나도 학교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가기는 했으나 더 이상 공부를 계속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결국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의 생계를 돕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학업을 포기했다. 내가 학업을 포기할 결심을 밝히자 교수들과 친구들은 말렸다.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제대로 학문을 닦은 사람들이 필요할 때다."

맞는 말이었다. 전란의 폐허 위에서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자면 많은 인재가 필요할 것이다. 대학 졸업장을 딴 인재들이. 그러나 내게는 대학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었다. 가족이었다. 지금 다시 그때와 같은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나는 그때와 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다.

피란살이가 끝나고 1953년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자 나는 본격적으로 생활전선에 나섰다. 정부와 함께 각종 기관.단체.기업들도 서울로 돌아와 정상적인 활동을 재개했다. 그해 한국상업은행이 환도 후 최초로 공개 채용시험을 실시했다. 나는 여기에 응시해 합격했다.

한국상업은행의 입사한 나는 동대문지점에 배치됐다. 무슨 일이든 일단 일을 시작하면 시간만 때우며 적당히 한다는 것은 내 사전에는 없었다. 입사한 지 한달이 채 안 되는 어느날 지점장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자네는 지금까지 내가 본 은행원들과 전혀 다른 타입의 사람이다. 단언하건대 자네는 장차 은행장감이다. 그러니 은행의 업무를 구석구석 다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한 곳에 붙박혀 있지 말고 여러 부서를 순환 근무시킬 테니 그리 알고 있어."

약속대로 지점장은 나를 여러 부서에 순환 배치시켜 짧은 시간 안에 은행 업무 전반을 익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다른 어떤 간부의 말보다 말단 행원인 나의 의견을 신뢰하고 채택했다.

입사한 첫 해에 결산기를 맞았다. 이자 계산을 하는데 나의 직속상관인 대리가 하는 방법이 상식에 맞지 않았다.

"대리님이 지시한 방식은 맞지 않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대리는 화를 냈다.

"시키는 대로 하면 될 일이지 왜 말이 많아."

"맞지 않는 일은 비록 상관의 지시라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옥신각신하다가 두 사람은 지점장 앞에 섰다. 두 사람의 주장을 듣고 있던 지점장은 그 자리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판단을 유보했다. 대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였다. 결국 며칠 지난 후 지점장은 나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비록 승리(?)했으나 기분은 찜찜했다. 이런 문제가 왜 발생하는가를 생각하다가 나는 아주 중대한 사실을 발견했다. 은행업무의 표준이 될 만한 규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당시 은행에는 규정집.예규집이 없었다. 그러니 업무의 통일성이 없고 중구난방이었다. 무슨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공문서철을 뒤져가며 비슷한 사안을 찾아내 판단의 근거를 삼는 것이 고작이었다.

'은행의 업무를 통일하고 표준화하는 규정집이 있었으면 행원이 대리와 다투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사무질서 확립과 업무의 효율성도 엄청나게 높아질 텐데…. 은행이 이럴 수는 없다'.

나는 국내의 다른 은행은 어떻게 하고 있나 알아보았다.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도쿄(東京)은행과 미국의 아메리칸 뱅크 두 곳에 규정집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편지를 띄웠다. 얼마 안돼 두 은행 모두 친절한 답변과 함께 규정집을 보내왔다. 나는 미국과 일본 은행의 규정집을 근거로 하고 우리나라 은행의 특색을 가미해 우리 나름의 규정집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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