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기의 비극 9년(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일은 KAL 007기가 사할린 상공에서 구소련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추락된지 만 9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의 희생자유족들은 이날 충남 천안 「망향의 동산」내 KAL기 희생자위령탑 앞에서 추도식을 갖고 구소련을 이어받은 러시아에 대해 피격된 KAL기의 블랙박스 내용을 공개하는 등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희생자 유족들이 추도식을 갖던 날 모스크바에서 날아온 연합통신 기사는 러시아정부가 최근 KAL기의 블랙박스 자료를 공개할 것을 검토했으나 그 자료가 공표될 경우 유족들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문제가 제기될 것을 꺼려 공개를 회피했다고 전하고 있다.
KAL기의 블랙박스를 회수,모스크바에 보관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돼있다. 러시아 국영TV가 지난 3월 방영한 「007기 미스터리」라는 프로에는 사고 당시의 KAL기 잔해가 흩어진 해저 1백80m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었는데,9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흩어진 기체의 잔해는 그날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옐친러시아대통령은 지난 6월 미국을 방문,부시 미국 대통령과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미묘한 발언을 했다. 그는 KAL기 사건의 진상을 묻는 기자질문에 이런 말을 했다. 지난해 쿠데타가 실패할 무렵 우리는 국가보안위원회(KGB)와 전 공산당중앙위원회 문서창고 등을 장악하고 지금까지 그 곳을 지켜왔다. 그러나 사건 몇시간전 우리는 두 기관의 문서창고에서 문서일부가 파기된 것을 발견했다. 그 문서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KAL기의 비극을 파헤치는데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이는 서류 1건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것은 KAL기 피격사건의 전모를 밝힐 서류들이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비망록이었다. 따라서 관계서류를 발견하는 즉시 사건의 전모를 밝히겠다.
옐친대통령의 말은 군부의 쿠테타 주동자들이 KAL기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서류를 없앴을지도 모른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혹시라도 그게 사실이라면 그들은 역사에 두번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오는 16일 옐친이 방한하는 기회에 사건의 전모가 시원스레 밝혀졌으면 좋겠다.<손기상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