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환율 '보약'… 돈 버는 미·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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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공정한 게임이 아니오. 수출 경쟁력을 부당하게 높이기 위해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과 다를 게 없잖소."(9일 미국 하원 공청회에 참석한 한 하원의원)

'엔저' 바람을 업고 미국과 유럽시장을 휩쓸고 있는 일본 제품에 대해 서방국가들의 성토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미 의회에서는 일본 수출품에 대해 상계관세를 발동하자는 법안도 제출됐다. 18, 19일 독일 포츠담에서 열릴 서방선진 8개국(G8) 재무장관 회담의 주요 의제도 '엔저'에 집중될 전망이다.

통화 약세의 덕을 보기는 달러도 마찬가지다. 달러 약세로 S&P 500지수에 들어가 있는 미 기업들의 해외 매출이 사상 처음으로 미국 내 매출을 앞설 것으로 전망된다. '약한 엔, 약한 달러의 힘'이 전 세계 시장을 강타하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경쟁력 상승=도요타 자동차는 2006년 4월~올 3월 영업이익이 전년도 대비 19% 증가한 2조2386억 엔에 달했다고 최근 발표했다. 이 중 엔저 효과만으로 얻은 영업이익이 2900억 엔. 때문에 유럽과 미국 자동차 업체들은 "엔저로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대당 2400달러(약 29만 엔)의 가격경쟁력을 얻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올 3월 일본의 자동차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22.2% 뛰었다. 이런 현상은 수출 관련 전체 업종으로 확산하고 있다. 기술력에다 엔저라는 원군까지 얻은 일본 기업으로선 절로 휘파람이 나오는 상황이다.

일 정부 발표에 따르면 일본의 3월 경상수지 흑자는 지난해 3월에 비해 37% 증가한 3조3172억 엔. 파이낸셜 타임스는 15일 "이는 1980년대 미.일 경제 마찰이 발생한 이래 최고 수준"이라며 "엔저로 인한 일본 수출 증가에 대해 미국과 유럽의 제조업체들은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미국과 유럽 국가 정부들도 대놓고 일 정부를 공격하지는 못하는 신세다. 일 정부가 2004년 3월 이후 외환시장에 전혀 개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돈 에번스 전 미 상무장관은 "약한 엔이 일본 수출을 도와주고 있는 건 맞지만 환율을 조작하고 있다는 증거 또한 없다"고 말했다. 때문에 일본에 금리 인상을 촉구해 어떻게든 흐름을 '엔고'쪽으로 몰아가려 하고 있다.

그러나 후쿠이 도시히코(福井俊彦) 일본은행 총재는 "금리를 현 수준(0.25%)에 놔두면 경제를 이상하게 자극할 우려가 있다"면서도 "그렇다고 제일 중요한 일본 국내의 경제.물가를 혼란시키는 정책도 절대 취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당분간 금리 인상은 힘들다는 대외 메시지다.

◆미국도 무역수지 개선될 듯=미 달러화도 일본 엔이나 중국 위안화에 대해선 제대로 절상이 안 돼 있지만 파운드와 유로, 대다수 아시아 국가 화폐에 대해 약세를 보이고 있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유럽과 아시아 국가에서 그만큼 미국산 제품의 수요와 경쟁력이 커지고 있다는 얘기다.

중장비 업체 캐터필라는 올해 북미 지역의 매출 감소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19%,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17%의 매출 신장을 기대하고 있다. 제너럴모터스(GM)도 인도 공장의 생산 규모를 두 배 이상으로 늘리는 등 해외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은 15일 "수출 증가에 따라 지난해 7653억 달러에 달했던 무역적자도 크게 줄어들 것"이라며 "현재와 같은 추세가 계속되면 수출이 일자리를 늘리고 지난 4년간의 저성장 기조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염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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