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 할일은 없다] 김화영의 시베리아 열차 횡단기 (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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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통 벗은 사내 하나가 보드카에 취한 채 열차 계단에 서서 나를 가로막는다. 기차는 떠나려 하는데 … 마지막 순간에야 사내는 길을 터준다. 진땀이 났다. 모스크바행 열차에서 여자친구를 잃어버리는, 피에르 가스카르 작품의 주인공처럼 될 뻔했다.

◇ 실패한 구애의 관객이 되어

산딸기와 오이, 그리고 물 한 병을 사들고 다시 식당 칸으로 돌아와 싸늘하게 얼린 보드카를 시켜 홀짝인다. 우리 옆 테이블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호리호리한 미녀가 혼자 와 앉아 간단한 식사를 시킨다. 그렇지, 소설에서는 바로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엮어지는 법. 분위기가 한결 살아난다. 일본 관광단 노인들이 똑같은 메뉴의 식사를 일사불란하게 마치고 빠져나간 식당 칸은 한적하고 쾌적하다.

이때, 저만큼 문간 가까운 테이블에 혼자 앉았던 건장하고 덩치 큰 노동자 인상인 50대 러시아 사내 하나가 종업원에게 자신이 마시던 맥주와 잔과 접시를 옮겨달라는 시늉을 하더니 물실호기, 그 말쑥한 여자의 테이블로 뚜벅뚜벅 걸어와 맞은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리고 그녀에게 맥주를 권하며 노골적으로 호감을 표시. 아아, 이게 러시아식 솔직함인가. 우리는 주역의 꿈을 포기하고 흥미진진한 관객의 자리로 옮겨 앉는다. 여자의 얼굴에 나타난 난처함이 서서히 불쾌감으로 변한다. 그래도 사내는 개의치 않고 술을 권한다. 그 표정이 간절하다. 드디어 여자가 다른 좌석으로 옮겨가 버렸다.

구애를 위하여 주문한 여러 병의 맥주와 푸짐한 안주 앞에 혼자 남은 저 덩치 큰 사내의 낭패감과 외로움. 그의 장면을 차마 바로 보지 못해 창 밖으로 돌린 내 시선은 자작나무숲 저쪽으로 가서 떠돈다. 이윽고 다시 고개를 돌리니 빈 테이블에 남은 술병과 음식들과 그 외로운 사내의 실패한 구애가 남긴 허망한 빈자리. 그 근처에서 내 마음도 문득 쓸쓸해진다.

오후 4시. 이름 모를 역에서 차가 서고 비가 온다. 어린 계집아이가 복도 창턱에 매달려 비 맞는 역사와 마을을 내다본다. 8시40분. 슈마노프스카이아 역. 다시 한밤중. 후텁지근하여 눈을 뜨니 3시40분. 어떤 사람들과 길게 줄을 서서 걷는다. 어떤 남자가 내 뒤쪽에 있는 여자에게 욕을 한다. 식당 칸에서 목격한 장면 때문일까? 꿈이었다. 어둠 속에 혼자 일어나 앉아 뿌연 창 밖을 내다본다. 거뭇거뭇 늘어선 나무들이 유령 같다. 간혹 저 지평의 끝에 아득한 불빛. 나는 옛날 이야기 속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머리맡의 등불을 켜고 배낭 속의 책을 꺼낸다. 피에르 가스카르의 중편 '시베리아 횡단철도'.

파리에서 은근히 마음을 두고 있었던 여자와 함께 '나'는 베이징으로 와서 기차에 오른다. 베이징에서 하얼빈을 거쳐 모스크바로 가는 트랜스만추리언 열차다. 승객들 중 극히 드문 유럽인인 '나'는 이 여행을 통해 여자와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중국 영토를 지나 러시아 국경에 이르자 승무원이 환전을 하기 위해 잠시 역에서 내려야한다고 알려준다. 여자 친구를 객실에 두고 혼자 내리니 한 열사람 정도의 외국인이 기다리고 있다. 함께 낯선 역사 안으로 들어가 오래 기다린다. 다시 소형 버스로 갈아타고 상당한 거리를 달려간다. 불안하다. 이러는 사이에 기차가 떠나버리면 어쩌나. 드디어 허름한 건물. 환전소다. '나'는 줄의 맨 끝이라 가장 나중에 돈을 바꾼다. 받아든 러시아 화폐뭉치를 다 세어서 확인한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이게 웬 일인가! 꿈인 듯이 일행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아무도 없다. 손짓 발짓 .영어.프랑스어.독일어로 묻고 항의하고… 사무원들 간의 복잡한 전화 통화 끝에 다른 차 한 대가 온다. 허둥지둥 역에 도착해 막 떠나려 하는 기차를 향해 뛰어나가려 하니 건장한 여자 군인이 출입문을 막고 제지한다. 그녀를 힘으로 밀치고 열차 쪽으로 다가가려 한다. 이번에는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철통같이 방비한다. 기차는 동행의 여자를 싣고 떠나버린다. 절망한 '나'는 역사 안의 뷔페로 돌아온다. 거기 기차 안에서 잠시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체코 외교관이 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있다. 그가 설명한다. 기차는 간단한 수리를 위해 차고에 들어간 것일 뿐이다. 곧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는 모든 외국 여행자를 짓누르는 악몽이다. 오랫동안 지속돼온 전체주의 체제의 낯섦, 통하지 않는 언어와 관습, 영어나 프랑스어의 알파벳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영 딴판으로 뒤집힌 키릴 문자의 생소함, 그리고 무엇보다 시베리아라는 광대한 공간, 그리고 끝날 것 같지 않은 긴긴 여로 이런 조건 때문에 여행자는 늘 불안 속에 놓여 있다. 카프카의 '성'에 들어가기 위해 헤매는 K의 방황. 이런 모든 것은 우리의 부조리한 삶의 은유다. 그러나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현실이다.

6월 29일 일요일. 쾌청. 아침 7시에 잠이 깨다. 밤 동안에 승무원이 교대했는지 처음 차에 오를 때 시트를 배급해준 그 비대한 체구의 젊은 여자다. 소나무.전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 바위와 산과 늪. 다시 오후. 저 언덕 위에 외롭게 서 있는 아름다운 네 그루의 나무, 한 그루는 앞에, 두 그루는 하나로 겹쳐져, 나머지 한 그루는 뒤쪽에… 그림처럼 서 있다. 나는 저 나무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

조제프 케셀의 소설 '야성의 시대'를 읽다가 복도로 나가서 창문 저 너머로 바라보는 풍경. 마치 신을 닮은 어떤 조경전문가가 풍경에게 이리 돌아 서보아라 저쪽으로 한바퀴 돌아보아라 하고 시키듯 기차가 구비 돌 때마다 풍경은 제 앞모습 옆모습을 고루 틀어 보여준다.

잠시 치타 역에 내린다. 일정 때문에 머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어둠 속에 중국인 노동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웅크리고 있다. 1914년 춘원 이광수는 상하이.블라디보스토크.하얼빈을 거쳐 치타에 갔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는 '신한민보'에서 주필이 되기 위해 가는 기이한 우회로였다. 우선 치타에 가서 '정교보(正敎報)'라는 조선문 잡지 일을 보면서 미국에서 회보 오기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그 '방랑의 형식'이 작품 '유정'(1933)으로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거의 20여 년이 지난 후였다. 치타 역에서 다시 기차에 오르려고 하는데 웃통을 벗어젖힌 검투사 같은 사내가 무슨 생선 말린 것 한 마리를 통째로 물어뜯으면서 객차의 계단을 가로막으면서 못 오르게 방해한다. 보드카에 만취한 모양. 기차는 떠나려 하는데. 마지막 순간에 타와이 타와이! 하며 길을 터준다. 진땀이 났다. 피에르 가스카르의 소설 주인공이 될 뻔했다.

6월 30일. 월요일 아침 7시. 부랴트 공화국 수도 울란우데가 가까웠다. 초원과 말들과 목장. 아침 10시30분 울란 우데 도착. 왠지 마음이 놓인다. 부랴트족이 우리의 모습을 많이 닮아 동류의식을 느낀 것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김화영 고려대 불문과 교수 <royan41@hanmail.net>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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