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이회창표 김치 vs 노무현표 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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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맛의 시대다. 이른바 '맛 코드'만 맞으면 돈이 벌리는 그런 시대다. 드라마 '대장금'이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것을 봐도 그렇고, 무기상을 하던 친구가 '맛 코드'만 맞추면 시내에 괜찮은 목 잡고서 고기 파는 것이 미사일 파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걸 봐도 그렇다. 한 마디로 '맛 코드'가 지배하는 시대다.

*** 장독에 담기듯 감옥 향하는 昌

그런데 이 '맛 코드'의 시대에 국민 입맛이 여간 씁쓸하지 않다. 그 잘난 정치가 입맛을 '확' 버려 놓았기 때문이다. 자고로 한국 사람들에게 입맛 되찾는 데는 잘 익은 김치가 제격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김치맛을 내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가. 그래서 김치맛 제대로 내려면 배추가 다섯번 죽어야 한다지 않던가. 배추가 땅에서 뽑힐 때 한번 죽고, 통배추의 배가 갈라지면서 또 한번 죽고, 소금에 절여지면서 또다시 죽고, 매운 고춧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이 돼서 또 죽고, 마지막으로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 다시 한번 죽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김치맛을 낸다는 것이다.

1년 전 오늘은 대선 D-1일이었다. 그때를 연상시키듯 주초에 기자회견 공방전을 벌였던 이회창씨와 노무현 대통령을 '맛 코드'시대에 걸맞게 김치에 비유해 보면 과연 어떤 맛일까?

이회창표 김치는 한 마디로 너무 절여져서 결코 겉절이가 될 수 없는 것이 겉절이 흉내내다가 낭패 본 경우다. 배추도 실하고 젓갈이며 고춧가루도 부족함 없이 뿌려졌건만 애초에 너무 절여졌던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1천만명의 표심이 몰렸던 것은 늘 먹던 맛에 대한 미련이었지, 이회창표 김치맛에 매혹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앞서 배추가 김치맛을 제대로 내려면 다섯번 죽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늦은 나이에 팔자에도 없어 보이는 정치를 했던 이회창씨는 지금껏 모두 네번 죽은 셈이었다. 1994년 YS문민정부 시절 총리 자리에서 쫓겨나다시피 하면서 처음 죽었고, 다시 신한국당 대표로 영입돼 97년 15대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두번째 죽었다. 그 후 세풍.안풍 등에 시달리며 세번째 죽었으며, 다시 지난 16대 대선에서 패배해 네번째 죽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제 불법 대선자금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든 책임을 지고 감옥 가겠다며 다섯번째 죽음의 길로 나섰다.

개인적인 평이지만, 이회창씨가 정치인의 길로 나선 이후 가장 본때 나게 한 것이 이번 일 아니었나 싶다. 이회창표 김치가 그나마 제맛을 내려면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야 했듯이 이회창씨 본인이 진짜 사는 길은 감옥행을 자청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구차하게 살아오지 않은 자신을 존중하는 길이고, 맛도 보지 않고 이회창표 김치에 1천만표를 몰아주었던 표심에 뒤늦게나마 보답하는 길 아닐까. 또 어쩌면 그것이 이 정권에 대해 날릴 수 있는 최상의 복수카드가 아닐까도 싶다.

한편 노무현표 김치는 절임이 생략된 겉절이에 비유할 수 있겠다. 지난 겨울 그 겉절이 맛에 '뻑'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겉절이는 어디까지나 겉절이다. 진짜 김치가 아니다. 겉절이를 장독에 담가 땅에 묻어 봐라. 어찌 되는지. 배추에 물이 차기 시작해 물컹해진다. 그 다음엔 썩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겉절이가 장독에 담긴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김치를 담글 때 가장 중요한 대목이 바로 절임이다. 제대로 절여야 김치맛이 나는 법이다. 이회창표 김치는 너무 절여졌던 반면에 노무현표 김치는 아예 절여지지 않았다고 본다. 그래서 겉절이로 먹기엔 좋았겠지만 오래 묵혀 먹기엔 애초에 불가능했던 게 아닐까.

*** 절인 김치와 겉절이의 차이

겉절이를 장독에 담아 땅에 묻은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장독 주인인 국민 중엔 통째로 버리고 김장을 다시 담글까도 생각해 봤겠지만 너무 번거로워 그냥 김치찌개나 끓여 먹기로 마음을 다잡은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장독에 담긴 겉절이가 제풀에 못 이겨 물 내고 거품 일으키며 장독 뚜껑까지 들썩거리게 만드니 장독 주인으로선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기야 겉절이가 어찌 장독 주인의 마음을 다 알랴마는.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