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의 거센 공격을 방어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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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13면

5세대 영화감독의 대표주자 장이머우 감독이 세 번째로 만든 중국형 블록버스터 39황후花39. 궁리와 저우룬파 등이 주연했다. 

먼저 퀴즈 하나. 다음 중 장이머우 감독이 속한 세대는? ① 3세대 ② 4세대 ③ 5세대 ④ 6세대

서민의 삶 감싸던 5세대 감독, 이젠 블록버스터로 승부 … 6세대는 중국 현실 날카롭게 비판

장이머우 감독  

중국영화에 관심 있는 독자에겐 어렵지 않은 문제다. 정답은 ‘5세대’. 장이머우는 근년 ‘영웅’(2003), ‘연인’(2004), ‘황후花’(2007) 등 중국형 블록버스터를 잇따라 들고 나와 흥행에 돌풍을 일으켰다. 이젠 2008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총감독까지 맡았다. 5세대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그의 영화 이력은 중국 문화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한 지 오래다.

장이머우, 그리고 천카이거와 텐좡좡 등은 어떻게 5세대라는 이름을 얻었을까? 세대론은 중국영화의 역사를 구분하는 가장 대중적인 방식이다. 흥미로운 점은 각각의 세대에 붙은 이름이 그 순서대로 정해진 게 아니란 것이다. 1세대란 이름이 있고 나서 2세대가 생기고, 다시 3세대가 생겨난 게 아니다. 5세대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생겼다.

내 서랍속의 동화 

중국의 영화교육기관을 대표하는 베이징영화대학은 문화대혁명 기간 강제 폐교됐다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신입생을 받아들였다. 천카이거ㆍ텐좡좡ㆍ장이머우 등이 모두 동급생이었다. 장은 동기들보다도 나이가 한참 많았다. 대학 규정에 따르면 22세 이하만 입학할 수 있었는데 장은 26세였다. 시험 볼 자격조차 없던 장은 문화부장관 황전(黃鎭)에게 탄원했고, 문화부 특별 지시로 입학을 허락받았다. 이들은 졸업 이후 오랫동안 공백 상태였던 중국영화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천카이거가 감독을 맡고 장이머우가 촬영한 ‘황토지’(1983)가 유럽의 여러 영화제에 알려지면서 이들은 새 이름을 얻게 됐다.

그렇다면 왜 하필 5세대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일까? 설이 분분하지만 이들이 베이징영화대학 제5회 졸업생이었기에 5세대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게 가장 유력하다. 뜬금없이 5세대가 등장하자 ‘역사’를 중시하는 이들이 거꾸로 된 셈법으로 4세대, 3세대, 2세대, 1세대라는 명칭을 보완했다. 이처럼 ‘세대론’ 자체는 중국영화를 이해하는 데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영화 100년 역사를 ‘세대론’에 의해 두루뭉술하게 나눌 수 있다.

5세대 감독들은 1980년대 초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화려한 색깔과 소리, 중국의 전통과 농촌을 중심으로 한 소재로 영화계를 주름잡았다. 홍콩 무협영화가 시들해지던 시점과 맞물려, 장이머우를 중심으로 한 대륙 영화가 들어와 신선감을 안기기 시작한 게 그 즈음이었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 뒤 베이징 한복판에서 이를 경험한 영화대학 직속 후배들은 자신의 선배들이 오늘의 중국 현실에 침묵하는 모습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장위안 등 젊은 감독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오늘-여기-우리의 삶’을 다루는 영화들을 만들었다. 베이징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고뇌와 슬픔, 좌절을 그린 ‘베이징 녀석들’이 그 시작이었다. 이들은 ‘6세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철저한 작가주의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한 이들은 윗세대로부터의 독립도 꾀했다. 6세대라 불리면, 5세대와의 단절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5세대의 아들임을 인정하는 셈이다. 중국 독립영화의 대표주자 자장커가 6세대라는 이름조차 거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 세기가 시작된 뒤 장이머우 같은 이들도 더 이상 5세대 같은 이름에 집착하지 않았다. 5세대란 말은 자신들의 고유한 작가정신에 대한 찬사였지만, 중국 내 영화시장은 너무나 형편없었다. 자신이 만드는 영화를 정작 중국인은 보지 않고, 국제적으로만 이름을 얻는 상황에서 새로운 선택이 필요했던 것이다. 장이머우는 적극적으로 정부 시책에 협력하기 시작했고, 인간미 넘치는 농촌의 풋풋한 이야기를 그린 ‘책상서랍 속의 동화’ 이후 상업영화 감독으로 전향했다. 그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중국 영화산업의 파이를 키우는 일이다. 미국과 인도에 이어 세계 영화 생산량 3위임에도 교육ㆍ선전 영화가 여전히 대부분인 중국 영화산업에 대한 자기 연민이기도 하다. 그의 선택은 13억 중국시장을 향해 진격해오는 할리우드의 거센 공격에 맞서 자국 영화를 방어하자는 것이다. 그런 장이머우에게 ‘예술이나 작가’를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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