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분사제도」도입/제일기획 대표이사 윤기선씨(현장 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비밀보안 잘돼 광고주들 안심”/직원 2백여명 별도 사무실로 옮겨/경쟁회사 광고 함께 수주 길 열어
모든 사업이 다 그렇겠지만 철저한 보안과 비밀유지가 긴요한 업종으로 광고업만한 것도 없다.
광고라는 제품 자체가 창의성이라든가 노하우의 결정체여서 그 자체로 「대외비」인데다 업무성격상 자연스럽게 광고주인 기업의 속사정이라든지 제품개발에 얽힌 은밀한 부분까지 속속들이 알게 되게 마련이어서 광고회사·고객간에는 보통 이상의 신뢰가 요구되는 것이다.
국내 최대 광고대행사인 제일기획이 이같은 필요성과 관련해 회사의 일부를 아예 별도의 건물로 옮겨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른바 「분사」 제도라고 불리는 이 영업방식은 일본 광고회사들 사이에서 90년대 들어 조금씩 번지고 있지만 국내에선 처음 시도된 것이다.
『우리회사의 작년 취급계약고가 2천억원을 넘어(2천1백74억원) 외형이 제법 거대화하다 보니 한가지 업종에서 치열하게 다투는 다수의 기업들을 동시에 광고주로 맞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일부 고객들은 자신의 영업비밀이 경쟁사에 넘어갈 것을 우려해 다른 대행사를 찾아나서려는 움직임마저 보이게 됐습니다.』
제일기획 윤기선대표이사 부사장(53)은 경쟁관계에 있는 다수의 광고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회사를 나누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현재 제일기획과 광고대행 계약을 하고 있는 1백30여개 업체중 이처럼 경쟁상태인 광고주는 25개 업종 60여개나 된다.
특히 세제류(피죤·제일제당) 의류(신원·유림) 에어컨(삼성전자·경원세기) 참치(한성기업·오양수산·제일제당) 우황청심원(삼성제약·조선무약) 등이 치열하게 맞부닥치는 대표적인 업종이다.
더구나 제일기획이 삼성그룹의 계열광고사라는 인식때문에 비계열 광고주들 중에서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을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시각을 부담으로 안을 수 밖에 없었다.
이같은 여론을 의식한 제일기획은 지난 2월중순 분사제도 실시를 대외적으로 공식 발표한뒤 6백여명의 직원중 2백여명을 서울 충정로3가 피어리스빌딩 사무실로 옮겼다. 이와 함께 경쟁이 치열한 식품·의류·제약업종을 중심으로 새 사무실에는 제일제당·한성기업·삼성제약 등에 대한 광고업무를 옮기고 기존의 평동 사무실에는 피죤·오양수산·대웅제약 등을 남겼다.
단일법인 아래 마치 두개 회사가 운영되는 체제를 갖춘 것이다.
따라서 여러개의 별도 자회사를 거느린 협력회사형태나 한 법인을 여러개의 독립채산단위로 나눈 사업부제도와 성격이 구분된다.
『시행한지 몇달 안돼 속단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영업비밀 보안문제를 놓고 우려를 나타냈던 광고주들의 동요가 크게 줄어든 것이 두드러진 변화입니다.』
그러나 윤 부사장은 분사제도가 본궤도에 오르기까지는 넘어야 할 벽이 많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조직을 둘로 나눈 것이 단순히 기업비밀을 보다 효율적으로 보안한다는 소극적인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날씬한 조직을 갖춰 광고주의 욕구에 보다 기민하게 부응한다는 적극적인 목적을 살려야 하는 만큼 『분사로 인한 영업효율의 증가분이 분사에 따른 추가비용을 능가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고 그는 말했다.
또 분사제도를 실시해 영업효율이 증대될 정도가 되려면 광고회사의 취급고가 최소한 1천억원 이상은 돼야 한다고 윤 부사장은 덧붙였다.
제일기획분사의 본보기가 됐다고 할 수 있는 일본 최대 광고대행사 덴쓰(시장점유율 25%)는 지난 90년 4월 사무실을 두개 빌딩으로 나눈뒤 특히 광고경쟁이 치열하고 까다롭기로 이름난 자동차업종에서 도요타·혼다·닛산·스즈키등 4개사의 광고대행 업무를 무난히 해내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 광고업계의 경우 사정이 좀 다르다. 「1업종 1사」주의가 워낙 뿌리깊어 경쟁사를 신규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아예 별도 자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관행이어서 분사제는 좀처럼 발붙이지 못하고 있다.
광고주·대행사 사이에 맺어진 동양적인 「신의」 관계가 표출된 것이 분사제도라고 생각하는 윤 부사장은 선진국 광고대행사들의 최근 국내 상륙에 대비,힘을 키우려면 학연·지연 등 「안면」으로 광고를 따내려는 악습을 지양하고 대행사들끼리 광고만드는 실력으로 경쟁하는 풍토가 하루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홍승일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