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바꾼리더십] 전남 영광 해룡고 권재국 교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해룡고의 권재국 교장(앞에서 셋째줄 왼쪽)과 박혁수 교감(오른쪽)이 학생들과 함께 학교 상징인 해룡상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영광=프리랜서 오종찬

20일 오전 전남 영광군 해룡고의 한 교실. 남녀 학생 30명이 고은 시인의 '문의마을에 가서' 등을 읽은 뒤 난상 토론에 들어갔다. 백경호(36) 교사도 학생들과 함께 생각을 주고받는다. 이 학교의 '현대시 특강' 과목은, 교사가 설명하고 학생은 듣기만 하는 다른 학교의 일방통행식 수업과 사뭇 달랐다.

수강생들도 학년별로 다양했다. 대부분이 2학년이지만1, 3학년생이 3명씩 포함돼 있다. 학생들이 학년에 관계없이 원하는 과목을 수강할 수 있는 무(無)학년제 보충수업이다.

1학년 서미리양은 "모르는 게 있으면 선배들에게 물으면서 공부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3학년 신영인양은 "현대시 부문이 약해 수강하게 됐다"며 "후배들과 수업받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백 교사는 "수강생들의 수준이 비슷해 수업 난이도를 조정하기 쉬운 데다 맞춤강의라 수업 효율이 매우 높다"고 했다.

◆ 교사 자질 향상에 우선 투자=시골의 평범한 학교였던 해룡고가 전환점을 맞은 것은 1996년. 설립자이면서 당시 교장이었던 권재홍(71) 이사장이 영광 원자력발전소의 '지역 명문고 육성자금' 57억원을 유치하면서 학교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그는 무엇보다 교사의 자질 향상에 힘을 쏟았다. 전국에서 뛰어나다는 교사들을 초빙해 해룡고 교사들에게 먼저 시범 수업을 하게 했다. 앞서 가는 다른 교사들의 강의 기법을 배우라는 의도였다. 또 행정 처리와 행사 개최에 편리한 행정부장.학년부장 중심의 학교 운영 방식을 교과부장 중심으로 뜯어고쳤다. 국어.영어.수학.과학 부장 등을 임명해 해당 과목의 강의 수준을 높였다.

박혁수(53) 교감은 "각 교과 부장이 매주 해당 과목 교사들과 협의하고, 부장 6명이 다시 모여 지혜를 모으다 보니 자연히 강의의 질이 개선되고 학생들의 학력이 신장됐다"고 말했다.

◆ 학생들이 강의 선택=2005년 2월 권재국(61) 교장이 취임하면서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됐다. 무학년제 보충수업을 도입한 것이다. 교사들이 학교 홈페이지에 강의계획서를 올리면 학생들이 이를 보고 능력과 희망에 따라 선택해 수강하는 시스템이다. 야간 학습도 학생들이 선택하게 했다. 교사들은 자신의 강의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교사는 "수강생이 적어 폐강되지 않으려면 학생 중심으로 강의 계획을 짜고 수업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는 등 늘 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학교 측은 대신 교사들에게 다른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다. 강의나 업무가 없으면 언제든지 퇴근할 수 있도록 했다. 권 교장은 "교사들이 복도에서도 업무협의나 결재를 하고, 행정 업무와 관련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배려한다"고 말했다. 이런 혁신 덕에 해룡고는 2007학년도에 서울대 7명, 고려대 10명 등 서울.경기 지역 대학에 119명의 학생을 진학시켰다.

해룡고가 유명해지자 신입생 모집에는 다른 지역 학생까지 몰린다. 현재 1학년 학생 중 영광군 밖에서 온 학생은 전체의 42%인 96명에 달한다. 벤치마킹 방문단도 줄을 잇는다. 지난해 1월 이후 전국 30여 개 학교에서 300여 명의 교사가 다녀갔다.

영광=이해석 기자, 임장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