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으로 임신돼도 낙태금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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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아일랜드 법원 명령에 인권·여성단체들 “발끈”
강간을 당하고 그 결과로 임신까지 하게된 한 어린 소녀에 대한 낙태허용 여부로 아일랜드가 들끊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최근 아일랜드 더블린 고등법원이 강간을 당해 임신한 한 소녀(14)에 대해 낙태수술을 받기 위한 영국 여행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데서 비롯됐다. 낙태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아일랜드 법때문에 영국으로 건너가 합법적으로 낙태수술을 받으려던 이 소녀가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아일랜드 각 인권단체와 여성단체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법원 결정에 강력히 항의하고 있다.
가톨릭국가인 아일랜드는 지난 83년 국민투표로 채택된 수정헌법에 따라 일체의 낙태행위를 법률로 엄격히 금하고 있다.
반면 영국에서는 지난 67년 제정된 낙태법에 따라 의사 2명의 서명 동의만 있으면 임신후 24주이내에는 자유롭게 중절수술을 받을 수 있다.
아일랜드의 인권 및 여성단체들은 법원의 출국금지 결정이 인도적 차원에서 지나치게 가혹한 것은 물론,여행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 기본정신에도 위배된다는 점을 들어 각종 시위를 통해 법원당국에 대한 출국금지 명령 철회 압력을 높이고 있다. 강간으로 피해를 본 어린 소녀가 겪고 있는 정신적·신체적 고통을 무시한채 법조문에만 집착하는 사법당국의 태도가 과연 올바른 처사냐는 것이 이들의 항변이다.
논란이 확대되자 아일랜드 의회도 법원과 정부측에 재고를 요청하는 등 이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당초 이 소녀에 대한 출국금지 명령을 더블린 고등법원에 의뢰한 아일랜드 법무부는 법원 결정이 「합법적이고 정당한 것」이라며 법원을 옹호하고 있다. 아일랜드 보건장관은 『기왕 임신을 한이상 그 소녀와 소녀 부모에게 아이를 낳아 필요한 사람에게 입양시키라고 설득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 파문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아일랜드 국내 각종 사회단체,특히 여성단체들은 이번 사건이 아일랜드의 가혹한 낙태금지법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주장,법의 수정 또는 완화를 촉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신임 앨버트 레널즈 총리는 이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칠 것을 신중히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파리=배명복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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