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유럽인들에게 독일의 사죄는 더 이상 뉴스거리도 아니다. 30여년 전인 1970년 빌리 브란트 당시 독일 총리가 바르샤바의 유대인 학살 추모비 앞에 무릎 꿇던 장면은 이미 역사 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독일은 대학살 피해자에게 거액의 보상을 한 것은 물론, 자국 청소년들에게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 가르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와 비교하면 최근 유럽 언론에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잘못을 반성할 줄 아는 독일에 익숙한 유럽인들은 위안부 강제 동원과 관련해 발뺌으로 일관하는 아베 총리의 모습에서 40년대 프로파간다(선전) 뉴스를 다시 보는 것처럼 낯설어 한다.
사실 유럽에서 지금 일본의 위치는 단순한 경제대국을 넘어선다. 문화적으로도 미국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가졌다. 어린이들은 아침저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런던과 파리의 직장인들은 회전초밥 식당에서 40~50유로(약 5만~6만원)를 내고 일본 음식을 맛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유럽인들은 과거사 문제 앞에선 단호하다. 얼마 전 파리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한 대학교수를 만났다. 일본 문화를 열렬히 예찬하는 그였지만 역사 왜곡 문제에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 때문에 일본이 여전히 선진국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이라는 아픈 과거를 가진 유럽인들에게 일본은 영원히 '돈 많은 후진국'일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홀로코스트 추모관의 방문록에 이런 글을 남겼다. "과거를 아는 사람만이 미래를 가질 수 있다." 일본의 정치인들이 적어도 그 말뜻 정도는 새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진배 파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