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기자의뒤적뒤적] 거리로 나앉은 가족의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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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길 위의 가족
권태현 지음
문이당

소설입니다. 소설을 손에 들 때 작가의 이름에 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언론이나 평론가의 호평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내세울 것이 많지 않습니다. 널리 알려진 작가도 아니고, 재미나 감동이 뛰어나다고 하기도 힘듭니다. 오히려 읽어갈수록 답답해집니다.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에 출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번은 눈여겨보기를 권합니다. 통속 드라마 같은 얄팍한 재미는 없지만 현실에 굳게 뿌리를 내린 힘이 있거든요.

가장의 사업 실패로 가족이 흩어집니다. 남편이자 아빠인 민시우가 광고기획사를 하다 빚에 쪼들려 집을 팔고 가족은 거리로 나앉게 됩니다. 시집 식구들의 외면으로 큰아들과 딸은 이모집으로, 엄마와 막내는 외삼촌 집으로 들어갑니다. 주인공은 거리를 떠도는 신세가 되지요.

해체된 가족의 삶이 온전할 리 없습니다. 주위의 손가락질에 딸은 손버릇이 나빠지고, 큰아들은 밤거리를 헤맵니다. 아내는 일터에서 상사의 희롱을 받고 남편은 노숙자 생활을 하죠. 그러다 노숙자 지원대책이란 말에 속아 창업사기를 당합니다. 결국 대학동창의 구애를 받은 아내는 마음이 흔들려 이혼을 제의하고 남편은 가족을 위해 비상수단을 택하는데…. 어쩌면 불행은 한꺼번에 닥치는지요.

작가는 주변에서 이런 가족을 여럿 보았답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들을 한데 담아낼 가족 유형을 그렸다고 합니다. 당연히 이야기는 다분히 정형적입니다. 그런데 군데군데 빛나는 대목들이 작품을 살립니다.

집을 넘기느라 짐을 싸면서 남편이 베란다에서 아파트 광장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그는 생각하죠. '내가 뛰어내린다면 어디쯤 떨어질까. 검은색 그랜저와 초록색 쏘나타 사이쯤 될까' 하고요. 막막한 심정이 전해져 가슴이 찡해집니다.

외삼촌 집에 얹혀사는 막내가 숨죽여 우는 부분에선 울컥합니다. 석빈이는 발가락이 아파 웁니다. 사달라기가 미안해 작은 신발을 참고 신다 보니 발가락 끝이 벌겋게 부었던 겁니다. "왜 우느냐"고 짜증을 내다가 "뭘 걷어차고 다녔기에 이 모양이 됐느냐?"고 소리지르던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사람은 모두 맑고 화창한 날을 좋아하지만 그런 날만 계속된다면 세상은 사막이 되고 말 것"이란 사우디아라비아의 속담을 들며 주인공을 위로하는 어느 채권자의 말에서 간신히 숨통이 트입니다.

재미나 감동만을 위해 소설을 읽을 일은 아니겠지요. 때로는 현실을 돌아보기 위해 작가의 힘을 빌릴 필요도 있습니다. 현실에 감사하며 서로 아끼고 사랑하자는 마음이 들게 한다면, 그것으로 소설은 제 구실을 한 것 아닐까요.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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