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블로그] "우리 과는 1등부터 순서대로 의대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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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있었던 서울대 졸업식에 늦은 졸업을 하는 입학동기가 축하해달라며 전화를 걸어왔다. 졸업을 축하해달라는 얘긴 줄 알았는데 "나 얼마 전에 의대에 합격했어"란다.

당시 수능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기록하며 의대를 마다하고 물리학과에 입학한 그 친구의 의대 전향 소식에 웃어야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렸다. 유난히 수학과 과학을 잘하던 그 친구는 대학시절 내내 '졸업하면 대학원에 진학하고 유학도 가고 싶다'며 과학도로서의 포부를 공공연히 드러내곤 했다.

본인의 얘기에 따르면, 군대에 다녀온 직후인 2002년경, 계속 과학을 하겠다 생각하니 살 길이 막막하더라고 했다. 언젠가부터 원하는 직장에 취직도 못한 채 제 앞가림을 못하는 선배들의 한심한 진로 고민도 그의 전향을 거들었다고 한다.

이공계 학과를 졸업한 기자의 주위에서는 이제 이런 얘기는 놀라운 일도 아니다. 졸업 후에 의대로 진학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는 학부생들도 더러 있다. 서울대에서 만난 한 공대 교수는 "요즘에는 의대 준비하기 편한 과가 좋은 과"라며 "수업시간에 의학전문대학원 시험 서적을 펼치는 학생들을 무조건 다그칠 수만도 없는 노릇"이라는 자조적인 말을 했다.

요즘 서울대에서 공대와 농대, 자연대를 통틀어 이공계열의 학부생은 두부류로 나뉜다고 한다. 의대로 옮겨간 사람과 아닌 사람. 더욱이 후자 중에는 의대에 가려고 준비중인 사람까지 포함되니 상황의 심각성이 알만하다.

자연대에서 생물을 전공한 고교 동창은 "우리 과는 1등부터 순서대로 의학전문대학원에 들어간다"며 자신이 의전대를 준비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의대가 아니면 치의대, 약대, 수의대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현재 치의학전문대학원(치의전)과 의학전문대학원(의전) 재학생을 합치면 생물계열과 화학계열 전공자 비율이 전체 재학생의 절반에 육박한다. 또 합격자의 3분의 1 이상이 서울대 출신이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포항공대 출신도 상당수여서 이들 대학이 의.치의학 전문인력 양성의 새로운 통로가 된 셈이다.

얼마전 서울대 공대 게시판에서 있었던 '도서관 자리 분쟁'만 봐도 알 수 있다. 의전대 준비생들때문에 과학도들의 자리가 모자란다는 비판에 대한 논쟁이었다. '평생 밥벌이할 직업을 갖기 위해 공부 좀 하는 게 죄냐'는 의견부터 '공대가 의대 가기 위한 준비학원이냐'는 반박도 만만치 않았다.

물리학과에 다녔던 동기는"2000년에 물리학과에 입학할 당시에는 의대 선택을 놓고 망설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후회한다"고 했다. 그는 현재 공대 대학원에 합격한 상태지만 석사학위가 있으면 취업이 더 힘들다는 말에 대학원 진학을 포기한 채 의전대를 준비해 합격했다.

의전대에 입학하기 위해 이공계 학부생들은 입학 때부터 의전대 입학을 목표로 시간표를 짜기도 한다. 꼭 이수해야하는 과목을 제외하고는 생물.화학.유기화학.물리를 중심으로 시간표 구성한다. 의전대입학과 상관없는 교양과목은 이수하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공계 학생들 사이에서는 '의전대 준비에 도움이되는 학과' 혹은 '전공공부를 소홀히 해도 졸업할 수 있는 학과'가 '좋은 과'로 통한다는 교수의 얘기가 농담은 아닌 것이다.

예전에 취재 때 서울대 바이오시스템.소재 학부 김경욱 학부장이 "장기적으로 보면 전공을 살리는 것이 더 좋다"면서 "단기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의지가 부족한 학생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는데, 과연 그럴까. 자기 분야에서 리더가 될 능력이 충분한 학생들이 전공을 열심히 공부해서 그 분야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과학도들에게 현실의 벽은 높게만 느껴진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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