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5)<제85화>나의 친구 김영주|물보다 진한 피|이용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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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피는 물보다 더 진하다는 말이 있다. 내가 어찌 우리 조선사람을 못 알아보겠는가. 일본 왕을 야만족인 추장이라고 부르는 그 통역은 필경 어려서부터 반일감정에 젖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한 그가 왜 일본군통역으로 있었을까. 더욱이 그는 왜 일본군 패망 후에 한달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을까. 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그 오해는 후일 풀렸지만) .
그날 회담장소는 주주시내 한복판에 있는 예배당이었다. 두 시간 남짓하여 제반 절차에 대한 회담은 끝나고 오후에는 중국군에 인계할 무기 수량을 확인하기로 하였다. 정오가 되가 회담장 안으로 구수한 일본된장국 냄새가 풍겨 나왔다.
일본군은 중국군 대표들의 점심을 준비하였으나 우리는 사양하고 어느 민가에 가서 미리 준비해 간 주먹밥을 먹었다. 우리가 들어간 민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양민을 파리 죽이듯이 한 이곳 헌법대장」만은 꼭 죽여서 원수를 갚아달라고 탄원하는 것이었다.
얼마전 장개석 총통은『원한을 덕으로 갚자』고 하였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과 남편을 무참하게 잃은 그들에게 덕 따위가 안중에 있을 리 없었다. 오후에는 무기고로 쓰고있는 국민학교로 갔다. 중국대표들은 일본군이 중국군에 인계할 무기를 파손하거나 탄환을 밤중에 강에 버린다는 정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군으로서는 청일전쟁이래 50년간이나『짱꼴라』『짱골라』(중국인을 멸시하는 말)하며 멸시해온 중국군에「천황페하」를 상징하는 국화문장표시가 새겨진 38식 총을 넘겨주는 것을 큰 치욕으로 생각하고「짱꼴라」에 넘겨주느니 차라리 파손하거나 강물에 버렸던 것이다.
중국대표들은 여러 번 나를 재촉했다.
『일본군 통역이 분명히 조선사람이라니 책임지고 빨리 포섭하라』는 것이다. 동포와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내가 더 급하다. 그러나 나는 그를 포섭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첫마디를 아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김 통역을 탄환상자 사이로 불러들였다. 탄환궤짝을 포개서 몇 개 씩 쌓아올린 좁은 통로는 은밀하고 조용해 숨어서 밀담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김동지,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나도 조선사람이오』하니 그는 몹시 놀라면서『선머 (심휘), 선머(뭐요, 뭐요)?』하는 것이다.
「중국군 대위가 뜻밖에 조선말을 하다니」그는 당황했고 어리둥절하고만 있었다.
『김 동지의 말대로「일본추장」도 항복했소.36년간 일본 놈들 등쌀에 다 찌든 우리 정신, 우리 국토를 다시 세웁시다. 우리 조국을 말이요. 그러기 위해 우선 일본침략군의 무장접수를 좀 도와주시오. 나는 김 통역을 믿을만한 동지로 확신하고 부탁하는 겁니다. 내가 하는 말 아시겠지요.
이렇게 말하자 어느새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어쩔 수 없이 일본군 통역이 된 자신이 부끄럽다면서 내 손을 왈칵 잡으며 하소연하려는 것이었다. 이 모두가 순간적이었다.
그와 이렇게 오랫동안 숨어서 이야기를 하게되면 통역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중국 측이나 일본측이나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면 우리를 찾을 것이 뻔하다.
나는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니 다음에 만나 회포를 풀자고 말하며 다시 한번 일본군의 이면동태와 기습계획 같은 것이 있는지, 그리고 현재 이 부대에 있는 조선병사들의 동태도 잘 살피도록 부탁했다.
일본군복 가슴에 부착된 그의 이름은 김일선. 나이는 24∼25세정도.
그날 밤 전방지휘소에 나와있던 왕 참모장에게 김 통역에 대해 보고한 나는 그가 우리요구대로 성심껏 협조한다면 무장해제가 끝나는 대로 중국군에 데려오겠다는 왕 참모장의 확약을 받아냈다.
다음날부터 접수대표단은 일본군 지역을 부지런히 출입하며 일본군 82여단 전체 무기와 인원의 예비검사를 끝냈다.
따라서 나와 김 통역의 접촉도 가속되어갔다.
김 통역이 순간순간 아무도 모르게 내게 제공한 정보는 중국군이 잔꾀를 부리려는 일본군을 힐난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었던 것이다.
김 통역은 일본군 무장해제가 끝나는 바로 그날 중국군으로 데려오겠다는 보장을 받았다.
다른 지역보다도 주주 일본군의무장해제가 가장 모범적이었던 것은 김 통역의 노력이 컸던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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