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유권자 표 얻으려 반미감정 이용하면 안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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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페리(사진) 전 미국 국방장관이 최근 열린우리당 정동영 전 의장을 만나 "한국은 반미 감정을 이용해 유권자의 표를 더 얻으려고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또 "미국 사람들은 대체로 현재의 한국 정부가 반미 감정을 이용해 정권을 잡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내 지한파 인사 중 한 명인 페리 전 장관은 1일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정동영 전 의장을 만났다. 두 사람의 면담에 참석했던 인사들은 3일 "페리 전 장관이 '한.미 관계 복원이 북핵 문제 해결의 중요한 열쇠'라고 강조하다가 이런 내용을 얘기했다"고 설명했다.

페리 전 장관의 발언이 알려지자 정치권에선 "양국 관계에 대해 예민한 발언을 직설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라고 반응했다. 그것도 한때 집권당의 간판이었고 차기 대선 후보 중 한 명인 정 전 의장을 상대로 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외교통인 정의용 의원은 "미국에서 한국 내 반미 흐름을 우려하는 시각이 있기는 하지만 이처럼 직설적으로 언급하는 걸 들은 적은 없다"고 했다.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소속 한나라당 진영 의원은 "미국 측 인사들이 지난번 대선 때 반미 촛불시위가 선거에 이용됐고, 다음 대선 때는 전시작전통제권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가 악용될 수 있다고 걱정하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페리 전 장관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했다고 한다. "미국은 이라크 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고 지금도 북핵 문제에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내가 미국 대통령이라면 북한에 심각성을 이해시키기 위해 김정일과 북한 체제에 타격이 가해질 수 있다는 걸 구체적으로 경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테러국가에 핵을 이전할 경우 미국 도시가 피해를 볼 수 있고, 그 경우 미국은 파멸적 보복을 가할 것"이라고도 했다.

6자회담에 대해선 "지금까지의 경과를 볼 때 별로 낙관적이지 않다. 미국이 결정한 정책에 대해 한국.중국이 지지를 해 줘야 협상력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면담 참석자가 전한 페리 전 장관의 발언 요지.

"그간 한국 정부 관계자들에게서 한.미 관계가 나아질 것이란 희망적인 얘기를 들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좀 더 구체적으로 반미감정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해 줘야 한다. 내년과 후년에 각각 있을 양국의 대통령 선거과정을 거치면서 한.미 관계가 공론화되고 이를 통해 개선되리라고 기대한다."

고정애 기자

◆ 페리=수학 박사. 1977년부터 행정부.대학.기업을 무대로 활약해 왔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94년 3월부터 3년간 국방장관을 지냈다. 98년 북한 미사일 위기 이후 남북한과 일본을 오가면서 대북정책조정관으로 활약했다. 99년 북한 방문 뒤에는 핵.미사일 문제를 포괄적.단계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페리 프로세스'를 내놓았다. 올 6월엔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고집할 경우 미국이 미사일로 선제 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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