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과 나쁜 일은 함께 온다. 남경필 인생이 그랬다. 33세에 “엉겁결에” 당선된 후 내리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2014년엔 경기지사가 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도지사 당선 직후 이혼을 겪었다. 같은 해 군 복무 중이던 장남은 가혹 행위를 저질렀다. 2017년엔 유력 대선주자 후보로 거명될 만큼 정치적 입지가 커졌지만 이번엔 장남의 마약 사건이 터지며 곤욕을 치렀다. 이듬해엔 경기지사 재선에 실패했다. 정치 인생 첫 패배였다. 하지만 그해 재혼했다.
정치를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을 55세(2019년)에 남경필은 홀연히 정계를 떠났다. 엇갈린 인생 궤적은 그의 말에 따르면 “인생사 무한히 반복되는 새옹지마”였다.
특히 남 전 지사 장남이 연루된 사건·사고는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유력 정치인 자녀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종종 있다. 대개 애써 외면하거나 시치미를 뗀다. 남 전 지사는 부모의 보호 본능을 거스르는 행동을 취했다. 아들을 경찰에 직접 신고했다.
지난 14일, 장남 상습 마약 사건이 일단락됐다. 1심 재판부는 아들 남씨에게 상습 마약 매수·투약 혐의로 징역 2년6월 형을 선고했다. 선고 직후 그는 인터뷰 요청에 응하며 장남 마약 사건과 관련해 “수년간 말 못 했던 속사정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복된 자수와 가족 신고 이면에는 어떤 속사정이 있었을까. 정계 은퇴는 단지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을까. 장남 사건은 ‘아버지’ 남경필과 ‘정치인’ 남경필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사업가로 나선 지 4년째, ‘기업인 남경필’은 어떤 모습인지도 궁금했다. 인터뷰는 지난 18일 중앙일보 상암사옥에서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지난 18일 남경필 전 경기도지사가 중앙일보 상암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정수경PD
- 장남이 1심 2년6월 형을 선고받았다. 항소할 건가.
- 1심 재판 직후 기자들이 묻길래 “재판부의 결정을 존중합니다”라고 얘기했다. 사실 내 마음은 달랐다. 판결에 감사했다. 아들 의사를 확인했기에 이젠 말씀드릴 수 있는데, 아들이 두 차례 자수하고, 가족이 두 번 자진 신고했다는 건 ‘스스로 치료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국가가 치료해 줬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아들도 같은 생각이다. 1심 재판에서 검찰이 치료감호 청구하고 법원이 그걸 인용해 줬다. 검찰이 항소해 아쉽긴 하지만, 실형을 살게 됐고 충분한 치료 시간이 될 것 같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항소는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들 마약, 수년간 감춰가며 안 해본 게 없다. 하지만….”
남 전 지사는 “(2017년 첫 투약 이후) 수년간 (마약) 문제를 감추며 안 해본 게 없다”고 했다. “병원도 가고, 권위자도 만나보고, 속세와 단절된 산속 기도원도 가봤지만, (마약 중독) 치료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에 이어 올해 1월 남경필 장남은 두 차례 자수했지만 구속을 면했다. 그리고 본인 뜻으로 보호자 동의가 있어야만 퇴원이 가능한 병원에 자진 입원했다.
- 왜 가족들이 직접 신고했나.
- 한두 달 병원에서 잘 지냈다. 그때 나는 이스라엘과 요르단으로 성지순례를 떠났는데, 3일 만인가 동생(남 전 지사 차남)에게 연락이 왔다. “형이 퇴원했다”고. 그래서 “야 말이 되냐? 아빠가 동의 안 했는데, 어떻게 나오냐?”고 물었다. 알고 보니, 병동 안에서 군인들이 법정 전염병인 수두에 걸렸다. 장남도 감염됐다. 무조건 퇴원해야 했다. (장남이) 치료가 안 된 상태에서 나왔는데, 집엔 아무도 없으니 불안해서 동생한테 “형한테 가보라”고 했더니, 동생이 “안 그래도 형 목소리가 이상해서 간다”는 거다. 집에 가보니 (장남이) 약을 하고 있었다. 그땐 망설임 없이 동생이 (경찰에) 신고했다.
가족의 신고에도 장남은 구속되지 않았다. 남 전 지사가 급히 귀국했다. 이후 장남은 남 전 지사에게 “병원에 가는 건 더는 의미 없다”면서 재차 마약에 손을 댔다. 다시 자수를 권유했지만, 장남은 “자수가 별로 효과가 없을 거 같다”며 “이번엔 아빠가 신고해 달라”고 했다. 결국 남경필은 아들을 직접 경찰에 신고했다.
조서에 명확히 썼어요. 우리 가족이 바라는 건 ‘사회로부터의 격리’라고.
남 전 지사의 뜻대로 결국 장남은 지난 4월 구속됐다. 남 전 지사는 변호사를 쓰지 않았다. 변호를 맡은 국선변호인은 남 전 지사에게 “아들을 버린 줄 알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남 전 지사는 “애초에 목표가 격리·치료·재활이었기에 판결을 내린 판사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필로폰 투약 혐의로 체포됐다가 구속영장 기각으로 풀려난 지 닷새 만에 또다시 같은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남경필 전 경기지사 장남 남모 씨가 4월 1일 오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심사)에 출석하기 위해 경기도 용인동부경찰서에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 자발적 신고는 죄책감, 책임감 때문이었나.
- 다 포함됐다. 신앙의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아들 덕분에 그 (마약) 세계를 많이 봤다. 아들이 마약 한 모습도 봤다. 약에 취한 그 순간은 흔히 ‘마귀’가 (아들) 안에 있는 것 같았다. 그때 그 모습은 내 아들이 아니었다. 마약중독은 의학 문제지만, 영(靈)적인 문제가 되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각 종교계도 마약 퇴치 운동에 함께 나서줬으면 한다. 예를 들면 ‘다르크(DARC·마약중독치유 재활센터)’ 공동체에서 마약중독을 치료하는 분들은 대부분 종교로 (약물중독을) 극복했다고 한다. 나도 본격적으로 마약 퇴치 운동에 힘을 보탤 생각이다. 재정적으로 돕는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다.
- 마약 한 모습을 실제로 보면 억장이 무너졌을 듯한데.
- 처음엔 억장이 무너지고 그다음엔 화가 난다. ‘어떻게 얘가 또 이러지, 그렇게 약속을 해놓고?’ 걸리면 “다신 안 그럴게요”라고 말하지만, 또 마약을 한다. (약속을) 못 지키고 신뢰가 깨진다. 신뢰가 깨지면 그때부터 고립된다. 고립되면 숨어들어 (마약을 하는) 그 길밖에 없다. 화를 가라앉히고 문제의 본질을 보면, 그때부터 ‘아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되겠다’라는 게 하나씩 보인다. 그러면서 병원도 가고…. 이게 과정인 것 같다.
- 보통 부모는 본능적으로 자식 죄를 감추려 할 텐데.
- (그동안) 사실 숨기는 시간이었다. (가정) 안에서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그게 본능은 맞다. 근데 결국 안 된다. 몇 년 전에 장남이 처음 마약에 손댄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의사에게 치료해 달라고 말했더니 그 의사가 “아들 살리고 싶으면 신고하세요. 이렇게 감싸서 될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땐 그 의사 말을 안 따랐다. 다른 의사를 찾아가 봤지만, 결국 가족이 뭘 할 수 있는 상황을 벗어나더라. ‘그때 신고할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마약을 접한 아이를 둔 부모가 있다면, 빨리 드러내는 게 좋다. 빠르면 빠를수록 해결이 쉽다. 몇 년간 체득한 경험의 결과다.
- 치료가 가능할 거라 믿나.
-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희망적이다. 아들이 자수했고 처벌을 원한다. 변호사를 원치 않았고, 항소도 안 했다. 이번에 아이(장남)가 “저는 한 번 완전히 바닥을 쳐야 돼요. 대강 끝나서는 안 됩니다. 저 받아들일게요”라고 말하더라. ‘이제 치료의 시작이구나’라고 느꼈다.
그는 “장남과 마약 퇴치 운동을 함께 하는 상상을 하면 가슴이 뛴다”고 했다. 2019년 정계 은퇴 선언 후 스타트업에 도전할 때도 여러 인터뷰에서 “가슴이 뛴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 말이 다시 나왔다. 물론 남 전 지사는 ‘마약 퇴치’가 부자간의 낭만적인 구호로만 가능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는 “마약청 신설 논의가 하루빨리 시작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쟁의 이유도 없고, ‘잡아 가둔다고 해결되지 않을’ 마약 문제는 지금 정도의 인식·제도·국가기관 상황으론 막기 어렵다”고 했다.
- 군 가혹 행위부터 마약 투약까지, 장남 문제가 ‘정치인 남경필’과 계속 엮였다.
- 아…굉장히 힘들었다. 죄책감, 책임감 등을 다 느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가능하면 숨기지 말자’ ‘아들 문제는 부모 책임이다’ ‘어떤 일이건 아들은 아들이고 모른 척하거나 버릴 수 없는 관계다. 끝까지 함께한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똑같다.

아들 마약 투약 혐의에 관해 사과 기자회견을 하는 남경필 전 경기도지사와 2017년 첫 투약 후 구속 전 피의자심문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는 남 전 지사 장남. 장진영 기자, 연합뉴스
- 정치 행보에 장남 사건·사고가 변수가 됐다고 생각한 적은.
- 있다. 있는데, 이것도 안 믿을지 모르는데… 겉으로는 역경처럼 보이는 일도 그 ‘뒷모습’은 기회일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나. 마냥 행복하게만 사는 사람은 없다. 근데 그 어려움과 난관을 마주했을 때의 태도가 그 사람 인생을 바꾼다고 생각한다.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 극복하려는 태도. 실패는 난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면서 일어난다. 난관이나 어려움 그 자체로 무너지지 않는다. 정치는 어떻게 보면, (아들 문제) 덕분에 안 한 걸 수도 있다. 정말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정치 안 하게 된 게 정말 감사하다. 어떻게 보면 축복 아닌가. 그래서 아들 탓을 하지 않는다.
- 아들은 아버지 걱정을 안 하던가.
- 장남이 제일 힘들어 했던 게 그거다. 아들이 “아빠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니에요? 나 때문에 선거 떨어지고 힘들어졌죠?”라고 묻는다. 근데 내가 “그래 인마! 너 때문에 다 망했어”라고 답했다면 진짜 모든 면에서 실패했겠지… 나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잘못한 거 맞아. 걸맞은 벌을 받아야 돼. 그렇지만, 아빠가 경기도지사라는 이유로 네가 받는 사회적 비난은 네가 보통 사람일 때보다 한 100~1000배 많을 거야. 네가 잘못한 건 책임져야 하지만, 그것(비난) 때문에 아빠는 너무 가슴 아프고 미안하게 생각해”라고. 나는 평소에 기사 댓글을 잘 안 읽는데, 장남은 본인 문제라 그런지 관심을 갖더라. 재판 고비마다 “댓글은 뭐라고 그래요?”라고 물었을 땐 “야, (나도) 안 봤는데, 오죽하면 가족들이 신고했겠냐. 아들 정신 좀 차려라. 뭐 이런 분위기가 많아”라고 답해 줬다. 장남은 자기 때문에 아빠가 망가진 게 아닌가 생각하는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남 전 지사가 국회에 입성한 건 33세 때다. 당시 자녀들은 유치원에 다녔다. 한창 잘나가던 ‘소장파’ 시절, 두 아들은 남 전 지사 지역구 내 초·중학교를 다녔다. 그는 “돌이켜보면 (주변에서) 늘 색안경을 끼고 봤기에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게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 자녀들이 어렸을 때, 정치인 생활을 했다.
- 가장 가슴 아팠던 사건이 있다. (노무현) 탄핵 사태 때로 기억하는데, 둘(장남과 차남)이 (친구와) 싸우고 들어왔길래, “왜 그랬냐”고 물으니 학교 형들이 “(아빠가) 탄핵에 찬성한 당 사람이야. 나쁜 사람이야. 우리 아빠가 그랬어, 너희 아빠 나쁜 사람”이라고 말했다더라. 그 얘길 듣고 한판 싸우고, 얼굴 터져서 집에 들어왔다. 그때 아이들을 유학 보낼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 기준으로 내가 너무 빨리 정치를 시작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 아이들과 대화를 많이 해야 했는데, 별로 (대화한) 기억이 안 난다. 그게 참 가슴 아프다. 요즘 교회 주일학교 교사를 하는데, 아빠들이 아이들과 소통하는 걸 보면서 ‘부모가 아이들과 저렇게 지내면 아이들이 삐뚤어지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난 부모로서 낙제점이었다.
“내 꿈은 ‘마지막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 정계 은퇴의 주된 이유가 뭐였나. 개인사도 영향 있었나.
- 여러 이유가 다 포함됐다. 아들 문제도 신경이 쓰이고, 선거 진 것 등등 많지만, 주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이제 내가 (정치판에서) 할 일이 없겠구나’ 그땐 정말 그렇게 느꼈다. 경기지사 시절, 문재인 전 대통령이 대선후보로 “연정(聯立政府·연립정부)을 배우겠다”며 경기도를 두 번 찾았다. (도지사실) 방문도 닫고 진지한 얘기를 많이 나눴다. 또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토론장에서 만나서는 내게 “(연정 관련해) 그냥 지사님이 개인적으로 도와주면 안 돼요?”라고 하길래 내가 “그건 안 됩니다. 그건 제가 흔히 얘기하는 ‘사쿠라’가 되는 거고요. 이건 당 대 당으로 하셔야 하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까지 묻길래 ‘연정 생각이 있구나’ 생각했다. ‘당선되면 큰 정치를 하겠구나’라고 기대했는데, 그 이후 정치 행보는 달랐다. 2018년 경기지사 재선에 실패하고 일본에 갔을 때만 해도 ‘1년 뒤에 화려하게 복귀해 2020년 총선에 데뷔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한국 정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나 같은 사람이 (정치) 할 수 있는 그 장이 열리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중도 정치하자’ ‘연정하자’ 외쳤던 나 같은 사람이 설 자리는 없었다. 국회의원 5선에, 경기지사 했으면 다음번엔 대통령 해보고 싶었다. 근데 이런 상황으론 대통령을 할 수가 없는 거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남경필 전 경기도지사
- 판을 갈아엎는 것도 정치인 몫 아닌가. 회피·도피는 아니었나.
-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경기지사 시절 ‘연정’을 했지 않나. ‘잘했어’라고 박수는 치는데, 그게 끝이다. ‘여기까지 잘했고, 자 이제 총선 들어가니까 서로 (싸움) 붙어!’… 그게(연정) 그냥 아무 의미 없는 거로 평가받는 걸 보면서 ‘트럼프와 비(非)트럼프의 대결’이 계속되는 미국식으로 (정치가) 간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정치적으로) 존재하기도 어렵고, 그런 정치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게 맞지 않았다. 그럼 떠나야지.
- 눈 한번 딱 감고, 대선까지 달려볼 생각 없었나.
- 그 길로 가려면 나도 독하게 마음먹고 갈등 유발하고 지지층을 결집하는 정치를 해야 했는데 그걸 못 하겠더라. 안 하고 말지. 난 ‘마지막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 스스로 ‘대통령직을 없애는’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 권력을 분점하고, 승자와 패자가 7대 3, 6대 4 정도로 권력을 나눠 갖고 국정을 책임지는 정치.
- 한국 정치, 그사이 뭐가 제일 달라졌다고 보나.
- 싸움이 더 치열해졌다. 중도 정치인들이 점점 사라져 간다. 달라지고 나빠졌다. 예전에는 미래 생존을 위해 당을 떠나 김부겸, 이광재, 원희룡 등과 미·중·일 등 해외 차기 지도자들을 만났다. 왜냐하면 그중 한 명이 (해외 지도자가) 되니까. 1년에 몇 번씩 격의 없이 모임을 가졌는데 요즘은 그런 게 없어졌다.
- 요즘엔 ‘남원정’ 같은 소장파 정치인도 잘 안 보인다.
- 아쉬운데, 그것도 우리 책임이다. 인사 제도가 문제다. 여야 막론하고 똑같다. 할 말 하고 권력자한테 대드는 사람들은 공천을 다 날렸다. 그게 몇 번 지나니 ‘아, 내가 다음에 살아남으려면 이러면 안 되겠구나’ 그걸 경험한 거다. 당시 여야 소장 그룹이 성공한 건 그런 활동을 했다는 그 자체다. 실패는 권력의 중심에 세우지 못한 것. 우리 책임이다.
남 전 지사는 “소장파 정치의 현실적인 한계를 느낀 때를 정확히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노무현 탄핵 사태 당시 소장파들이 우왕좌왕했던 지도부 교체에 성공한 그 ‘때’를 놓쳤다”며 “그냥 일단 (지도부를) 밀어내자고만 했지, 밀어내고 뭘 할 것인가에 대한 정책·인물·철학적 공백을 대안을 갖고 채우지 못했다. 엉뚱한 이들이 권력을 가져가 변방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과거 동지들은 아직 정치활동 중이다.
- 원희룡 장관, 오세훈 시장, 정병국 위원장에겐 그냥 미안하다. 맡겨 놓고 나온 것 같아서(웃음).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다. 현실과 이상 가운데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걸 보면 그냥 응원하고 싶다. 원래 꿈꿨던 걸 이뤘으면 좋겠다. 초심을 잃지 않고, 그 ‘자리’가 아니라 그 ‘마음’을.

한나라당 소장파 시절 정병국·남경필·원희룡(왼쪽부터)
- 과거 ‘연정’ ‘보수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이런 건 지금도 유효한 가치라고 보나.
- ‘보수의 개혁’ ‘소장’의 정의가 좀 달라졌다. 과거 소장파 정치는 ‘수단’이나, 당시의 ‘역할’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윈(win)’과 ‘루즈(lose)’의 차이를 10대 0에서 7대 3, 6대 4 구조로 바꾸는 정치인을 지지하고 싶다. 그래야 극단적인 이념·세대 갈등이 통합된다. ‘권력 분점’이 요즘 시대의 개혁이고 소장파다.
“사업도 ‘연정’의 연속”
- 사업가로 변신한 지 4년째다.
- 정치 은퇴하고 ‘빅케어(Bigcare)’를 창업했다. ‘스타트업은 이런 거구나’ 배우며 ‘빅케어’를 상당 수준으로 키워냈는데 작년부터 고민이 들었다. 빅케어는 의료업 빅데이터 플랫폼이라 ‘의학적으로 상당히 깊은 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한편으론 ‘블록체인’ ‘가상화폐’ 생태계에 대한 관심과 기술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이걸 잘할 수 있을까? 다음 단계 도약을 위해 새로운 리더가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하는데 경영권을 인수하겠다는 분들이 나타났다. 남은 직원들의 이해를 바탕으로 경영권을 매각했다.
- 지금은 뭘 하고 있나.
- 올 초부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그동안 만났던 젊은 CEO들과 회사를 차렸다. ‘무빌리티(Movility)’ 등 스타트업 4개 회사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내 직업은 ‘컴퍼니 빌더(Company Builder)’다. CEO도 아니고. 벤처 캐피털리스트(Venture Capitalist)도 아니고, 그 중간쯤의 ‘캡틴’이다. 컴퍼니 빌더, 게임 체인저들의 캡틴으로 그들을 끌고 나가는 일을 한다. 핵심은 ‘혼자 먹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 자기보다 더 잘하는 인재들에게 자기 지분과 권한을 과감히 위임하는 게 성공의 지름길이다.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 그리고 네트워킹이 함께 가지 못하면 실패한다. 난 후자를 맡았다. 이제 시작이지만 성공할 거라 믿는다. 어려운 싸움이 되겠지만 이런 건 정말 가슴이 뛴다.
- 사업 스타일이 정치 스타일과 닮았다.
- 맞다. 자꾸 느낀다. ‘아 나는 독식 주의자가 아니다’ ‘혼자 할 수가 없다’라는 걸. 사실 정치할 때도 그런 걸 계속 느껴서 ‘연정’을 했다. 지금 만든 회사들은 어떻게 보면 다 연정의 연속이다.
- ‘정치인 출신’이란 게 핸디캡은 아니었나.
- 내가 엄청 권위적일까 봐 (사람들이 나를) 처음에 만날 땐 긴장하는데, 내가 나를 열고 망가지면, 기대하지 않았던 편안함이 들어오면 (반응은) 기대 이상이다. 그게 장점이다. 혹은 ‘정치인하고 일하면 혹시 손해 보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 같다.
- 정치 경험이 회사 운영에 도움이 됐던 적은.
- 하나 있는 것 같다. 난 장점만 본다. 가능하면 단점은 잘 안 본다. 사실 정치할 때 생겨난 스타일인데. 사실 정치하면서 보좌진이나 후원인들에게 줄 수 있는 게 없다. 일해 주는 게 감사한 거다. 그럼 그들의 그 장점을 취하며 일해야 하는데, 정치할 때 보면 많은 이들이 ‘쟤는 저게 문제예요’ ‘이런 것 때문에 가까이하시면 안 돼요’ 그런다. 하지만 나는 ‘소시오패스(sociopath) 빼곤 가까이 못 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름대로 장점이 다 있다. 그 장점을 묶어내는 게 정치할 때 리더십이었는데, 비즈니스는 더한 것 같다.
- 10년 뒤 목표는.
- 벤처캐피털을 운영하지 않을까. 작은 회사들을 액셀러레이팅(accelerating)하고 그 회사들의 경영에 직접 인사이트를 불어넣어 주며 키워내는 ‘500 Startups’ 같은 회사의 ‘캡틴’. 한국에도 그런 회사가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 10년 후면 거의 칠십 살이다. “여전히 젊게 사시네요”라는 이야기를 듣는 캡틴이 되고 싶다.

신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