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정부의 물대응이 무법천지 불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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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저지를 위한 농민 집회와 민주노총의 파업결의대회 등이 열린 22일 전국 13개 도시에선 공공시설물이 불타고 불법과 폭력이 난무했다. 대전에서는 시위대가 충남도청 울타리 등에 불을 지르고 제지하는 경찰에 죽봉과 각목을 휘둘러 시가전을 방불케 했으며, 광주에선 시청 건물 대형 유리창 수십 장이 깨졌다. 한마디로 무법천지였던 것이다.

이번 사태의 1차적 책임은 집회를 허가하고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경찰에 있다. 경찰은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 측이 전국적인 동시다발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음에도 사전에 이를 파악하지 못했다. 더구나 시위대가 도청 등 공공기관 진입을 시도할 것이란 첩보를 입수하고서도 방화.폭력행위에 속수무책이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경찰의 안일한 대처 방식은 도심집회를 두고 그동안 오락가락해온 수뇌부의 방침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달 이택순 경찰청장은 교통혼잡을 일으키는 주말 도심집회 주최자에 대해 엄격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이후 경찰은 범국본이 지난 13일과 17일 신고한 서울집회를 교통혼잡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불허했다. 그러나 20일 장소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울광장으로 변경해 다시 신고하자 집회의 자유 운운하며 이를 허가해 줬다. 이러니 불법 시위를 막아야 하는 일선 경찰들로선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불법 시위에 대한 이 같은 '물 대응'이 결국 무법천지와 공권력의 무력화를 불러 왔다.

문제는 공권력 무력화의 책임을 경찰에만 돌릴 수 없다는 점이다. 지난해 11월 폭력이 난무했던 여의도 농민시위 당시 농민 2명이 사망하자 쇠파이프를 휘두른 시위대엔 관대한 채 경찰청장을 퇴진시켰다. 그러다 보니 시위대에 집단 폭행당한 경찰관이 "차라리 맞는 게 낫다"며 이를 숨기려 하는 기막힌 일까지 벌어졌다. 이 나라를 더 이상 무법천지로 방치하지 않겠다면 이제부터라도 불법.폭력 시위에 단호하게 대처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