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아시아 영화의 미국식 변신, 그 뒤엔 그가 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하고 마틴 스코시즈 감독이 연출한 영화 '디파티드'. 지난달 초 미국에서 개봉(국내에서는 23일 개봉 예정)한 이 작품은 개봉 한 달여 만에 1억 달러가 넘는 흥행 수입을 올리며 인기를 끌고 있다. 류더화(劉德華) 주연의 홍콩 영화 '무간도'를 미국 보스턴을 배경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로 다시 만든 것이다. 영화가 끝난 뒤 제작진과 출연진을 소개하는 엔딩 크레디트에서 관객들은 '책임 프로듀서 로이 리'라는 이름을 볼 수 있다. 재미동포 2세 영화인으로 할리우드에서 '아시아 영화 리메이크의 귀재'로 통하는 인물이다. 전지현 주연의 한국 영화 '시월애'를 샌드라 불럭 주연의 '레이크 하우스'로 다시 만든 것도 그였다. 로이 리(37)를 최근 LA 인근 베벌리힐스에 위치한 그의 회사 버티고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서 만났다.

할리우드 리메이크 영화 ‘레이크 하우스左와‘디파티드’의 한 장면. 큰 사진 위 동그라미는 각각 원작 영화 左‘시월애’와‘무간도’. 우측 동그라미는 현재 리메이크 작업 중인‘엽기적인 그녀’上와 ‘장화, 홍련’

#미국판 '링'의 성공을 발판으로 도약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 영화에는 할리우드에 없는 참신한 소재가 널려 있죠. 사실 관객은 소설이나 만화를 원작으로 했느냐, 다른 영화를 리메이크했느냐에는 관심이 없어요.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느냐 하는 거죠. 아시아에서 흥행한 영화라면 할리우드에서도 성공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가 주로 리메이크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처음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 제작자로 이름을 알린 것은 2002년. 일본 공포 영화 '링'의 리메이크 판권을 사들인 뒤 스티븐 스필버그의 드림웍스와 손잡고 영화로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할리우드에선 아시아 영화의 리메이크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지만 미국판 '링'이 1억3000만 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리면서 그는 단숨에 유명해졌다.

"어느날 집에서 비디오로 '링'을 보다 깜짝 놀랐어요. 지금까지 미국 공포영화에선 보지 못했던 두려움을 느꼈거든요. 이웃에 잘 아는 드림웍스 관계자가 살았는데 그를 찾아가 영화를 보여주며 리메이크를 제안했죠."

'링'이 성공하자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들이 경쟁적으로 "함께 리메이크를 추진해 보자"고 연락해 왔다. 이렇게 해서 '그루지'(2004년.원작 일본 '주온'), '링2'(2005년),'다크 워터'(2005년.일본 '검은 물 밑에서') 등을 잇따라 만들었다. 특히 올해는 '에이트 빌로우'(일본 '남극 이야기')를 비롯해 '레이크 하우스''그루지2''디파티드' 등 네 편이나 내놨다.

"그동안 손해를 본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괜찮은 아시아 영화를 찾으면 제일 먼저 저에게 연락하죠. 그만큼 앞으로 기회는 무궁무진합니다."

#변호사 생활 청산하고 할리우드행

1969년 뉴욕에서 의사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영화계에 뛰어들 생각은 없었다. 전문직을 선호하는 부모의 기대대로 조지워싱턴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뒤 아메리칸대 로스쿨을 마치고 변호사가 됐다. 그러나 하루 종일 각종 서류와 씨름해야 하는 변호사 생활이 이내 지겨워졌다고 한다. 그러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할리우드에 혈혈단신 차를 몰고 찾아왔다. 처음엔 알파빌이란 영화사에 들어갔다가 2001년 친구인 더그 데이비슨과 함께 현재의 회사를 차렸다.

"변호사로는 창의적으로 일할 수가 없었어요. 매일 밤 학교 숙제를 하는 기분이었죠. 그러나 할리우드는 전혀 딴판이에요.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고 차근차근 구체화할 수 있거든요. 성공하든 실패하든 결과는 온전히 자기 것이 되는 것이 매력이죠."

#한국 영화 리메이크도 속속 촬영 개시

그는 한국 영화의 리메이크에 대해서 특히 적극적이다. 첫 작품인 '레이크 하우스'는 올 6월 미국에서 첫 선을 보인 뒤 전 세계 영화시장에서 1억1400만 달러의 흥행 수입을 기록했다. 현재 할리우드의 주요 영화사들과 손잡고 '엽기적인 그녀''중독''장화, 홍련' 등의 리메이크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엔 '괴물'의 리메이크 권리도 사들였다.

"한국 영화는 아시아에서 커다란 인기를 끌고 있지만 미국에선 전혀 사정이 다릅니다. 자막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미국 시장은 한국 영화뿐 아니라 외화 전체에 대해 장벽이 높습니다. 외화 중에서 흥행에 성공하는 것은 연간 한 두 편에 불과해요. 그래서 리메이크가 필요한 거죠."

한국 영화 리메이크 중 두 번째로 제작에 들어간 것은 이병헌.이미연 주연의 '중독'. 미국 제목은 '애딕티드'로 정했고, 사라 미셸 겔러가 여주인공을 맡았다. '엽기적인 그녀'도 '마이 새시 걸'이란 제목으로 조만간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다. 전지현 자리를 대신할 미국 배우로는 엘리사 커트버트가 캐스팅됐다. '장화, 홍련'은 내년 4월 촬영 개시를 목표로 작업 중이다.

"대부분 원작 자체가 워낙 좋기 때문에 이야기의 줄기는 가급적 그대로 가져오려고 해요. 그래도 배경이나 구체적인 설정 등은 바꾸지 않을 수 없어요. 예컨대 '괴물'은 뉴욕 허드슨강에 출몰하는 괴물 이야기로 그릴 계획이에요. 진한 가족애는 최대한 살리고 괴물의 탄생 원인 같은 것은 고쳐 써야겠죠."

LA=주정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