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미.중 3자회동을 통해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을 누그러뜨릴 시간을 벌게 됐다. 또 6자회담 틀 안에서 동결된 자신의 해외계좌 해제 문제를 다루는 것도 가능해졌다. 무엇보다 '핵 보유국'으로 행세하며 회담판에서의 입지를 넓힐 수 있게 됐다는 판단을 할 수도 있다. 7월 미사일 발사에도 꿈쩍하지 않던 부시 행정부를 화들짝 놀라게 했고, 결국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를 베이징에 달려오게 했다. 이런 김정일식 협상 행태는 1993년 3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와 준전시상태 선포 때 선보였다. 98년 8월 대포동 1호 미사일 발사와 2002년 10월 고농축 우라늄(HEU)에 의한 핵 개발 의혹으로 불거진 2차 핵 위기에서도 재연됐다.
북한은 이 같은 벼랑 끝 전술로 나름대로 대미 협상에서 '그럭저럭 버티기'를 해왔다고 볼 수 있다. 관영 매체를 동원한 주민 세뇌를 통해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과 결속을 강화하는 효과도 거두고 있다.
그렇지만 전문가들은 김정일의 협상술이 약효가 떨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북한의 다음 수순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라는 얘기다. 핵실험 직후 북한 전문가들은 평양 측이 곧 6자회담에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핵실험으로 북한의 협상카드가 상당 부분 소진된 데다 대북 제재로 인해 체제의 내구력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는 것이 김정일 위원장의 고민거리일 수 있다.
이영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