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간첩' 터진 지 사흘 만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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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규(사진) 국가정보원장이 물러난다. 국정원은 27일 "김 원장이 어제(26일) 대통령을 만나 외교안보 진영을 새롭게 구축하는 데 부담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의를 표명했다"고 발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 원장의 퇴진 의사를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광웅 국방.이종석 통일부 장관에 이어 김 원장도 떠남에 따라 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외교안보 부처 수장이 전원 교체되게 됐다.

◆ 대통령 면담 일정 갑자기 잡혀=김 원장의 갑작스러운 사의 표명을 놓고 음모론이 제기됐다. 이는 국정원이 여권 내 운동권 출신 386 인사들을 상대로 간첩단 사건 수사를 확대하는 시점에 맞춰 공교롭게 김 원장의 사표 문제가 불거졌다는 데서 출발한다.

우선 김 원장이 관두겠다는 뜻을 밝히고 노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기까지의 과정을 놓고 청와대와 국정원 측의 설명이 엇갈린다.

당초 김 원장은 윤 장관과 이 장관이 잇따라 사의를 표명하자 자신도 그만두려 했다. 하지만 청와대 측에서 "국정원장 교체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흘러나오자 이를 유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까지만 해도 청와대에선 김 원장의 유임을 거론하는 인사가 많았다.

그러던 중 26일 오후 갑작스럽게 노 대통령과의 면담 일정이 잡혔다. 이 자리에서 김 원장이 퇴진하겠다고 하자 노 대통령이 즉석에서 "알았다"고 해 거취 문제가 결론났다는 게 국정원 측 설명이다. 국정원의 간첩단 사건 수사는 24일 밤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반면 청와대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이 즉답 대신 "생각해 보자"고 했고 하룻밤을 고민한 뒤 27일 오전 수용키로 결정했다고 말하고 있다. 청와대 면담을 놓고 양측이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 셈이다.

◆ "국정원장 바뀌면 수사 영향 받아"=특히 국정원의 핵심 관계자는 "노 대통령과의 면담을 청와대 측에서 먼저 요청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그래서 국정원 측은 자진 사퇴라기보다 경질이라고 보고 있다.

유임 가능성을 내비쳤던 청와대가 간첩단 사건이 정치권 전반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김 원장을 불러 사의를 표명하는 형식을 밟게 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과 김 원장의 면담은 원래 11월 1일로 잡혀 있었다.

국정원 관계자들은 이 과정에서 청와대 내 386 참모들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민주노동당 간부의 북한 공작원 접촉 사건을 발표한 이후 일부 청와대 인사가 매우 못마땅해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대공 수사의 특성상 정보기관의 장이 그만두면 수사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청와대 측은 김 원장의 퇴진과 간첩단 사건을 연관짓는 것은 음모론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청와대의 핵심 관계자는 "당초 김 원장은 교체 대상에 포함돼 있었지만 시기를 놓고 고민했을 뿐"이라며 "국회 인사청문회 등을 감안하고, 후임자의 재임기간 1년을 보장하려다 보니 이번에 한꺼번에 교체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했다"고 말했다.

박승희 기자

◆ 김승규 원장(63)은=검찰 출신으로 대검 차장과 법무부 장관을 지낸 뒤 지난해 7월 국정원장에 임명됐다. 취임 한 달 만에 '국정원 불법 도청 사건'을 떠맡았으며 국가정보기관 창설 사상 처음으로 도.감청 사실을 인정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는 임동원.신건 두 전직 국정원장의 구속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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