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대권주자들의 독일 배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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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물론 우리 정치인들의 독일 배우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멀지만 가까운 나라' 독일 따라 배우기의 첫 주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그의 최대 치적으로 꼽히는 경제개발 구상은 대부분 독일에서 따왔고, 실제 독일의 도움도 받았다. 독일 농촌을 보고 새마을운동을 생각했고, 아우토반을 달리며 고속도로를 계획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독일의 동방정책과 통일에서 햇볕정책과 남북 정상회담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남북 정상회담 직전 남북 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노무현 정부도 노사관계나 분배.복지 등 각종 정책을 추진하면서 독일 모델을 참고했다.

이렇게 보면 이제 독일은 우리 정치인들, 특히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들에겐 필답 코스가 된 느낌이다. 아마도 고건 전 총리도 조만간 독일을 방문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독일은 여러 모로 우리가 배울 게 많은 나라다. 무엇보다 같은 분단국 처지였다가 통일을 달성했다. 통일 후유증을 앓기도 했지만 최근 경제가 다시 살아나면서 여전히 유럽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복지나 분배 측면에서는 우리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사회안전망이 잘 갖춰져 있다. 그러니 진보든 보수든 독일에서 배우고 싶은 게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대권주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겉만 보지 말고 속까지 제대로 배우라는 것이다.

우선 정동영 전 의장이나 진보 인사들은 슈뢰더의 신중도가 무슨 뜻인지 제대로 헤아리기 바란다. 노조 등 좌파의 지지로 정권을 잡은 슈뢰더였지만 개혁을 위해 '노조 때려 부수기'의 선봉에 섰다. 그게 슈뢰더의 신중도다. 지금 독일 경제가 회복 국면에 들어선 것은 슈뢰더의 '배신' 덕분이다. 자기 지지기반을 정면으로 배신할 자신이 있는가

박근혜 전 대표는 메르켈 총리가 같은 공학도 출신에다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라는 점에만 유대를 느껴선 안 된다. 기민당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남성 정치인을 능가하는 조정과 화해력, 그리고 뚝심으로 당을 살려냈다. 특히 슈뢰더 정권 때 미국과 관계가 소원해지자 야당 대표로 미국을 수시로 드나들며 국익을 위해 노력했다. 한.미 관계가 이토록 나빠졌는데 그동안 박 전 대표는 어디에 있었나.

이명박 전 시장도 운하만 보고 돌아오면 안 된다. 도로.철도 등 잘 갖춰진 물류 시스템은 물론 성숙해진 노사관계나 철도.체신과 같은 국영기업의 민영화 등 경제인 출신으로 참고할 게 많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이 독일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통일 대통령'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착각해선 안 되는 게 있다. 독일 통일은 동독의 민주화운동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서독은 여러 형태로 지원했다. 그러나 인권 개선 등 반드시 조건을 달았다. 동독 시민들이 서독 방송을 시청했고, 자유 왕래가 가능했다. 동독 군부가 백기 투항한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통일 후 2000조원이 넘는 돈을 동독에 퍼붓느라 세금이 늘어난 서독 주민들도 이젠 화가 나 있다. 과연 우리가 이런 조건들을 충족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제발 통일 낭만주의에서 빠져나오라는 고언을 해주고 싶다.

유재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