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집보다는 길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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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집보다는 길에서'- 황동규(1938~)

집보다는

길에서 가고 싶다.

톨스토이처럼 한겨울 오후 여든 두 살 몸에 배낭 메고

양편에 침엽수들 눈을 쓰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눈길을

혼자 터벅터벅 걸어 기차역에 나가겠다가 아니라

마지막 쑥부쟁이 얼굴 몇 남은 길섶,

아치형으로 허리 휘어 흐르는 강물

가을이 아무리 깊어도

흘러가지 않고 남아 있는 뼝대

그 앞에 멎어 있는 어슬어슬 세상.

어슬어슬, 아 이게 시간의 속마음!

예수도 미륵도 매운탕집도 없는 시간 속을

캄캄해질 때까지 마냥 걸어.


톨스토이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향했던 역이 야스나야 폴라냐 역이던가? 황 선생이 향하고 싶은 역은 어슬어슬 역이군. 기차 대신 쑥부쟁이, 허리 휜 강물이 지나가는 역이군. 뼝대라는, 하늘로 향한 아름다운 역사(驛舍)가 딸려 있는. 근처 매운탕집에 들렀던 예수, 미륵 다 어디 가셨나. 빈 어슬어슬 역이군.

<장석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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