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국익이냐, 국가적 利己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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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라크 추가파병을 놓고 국익논쟁이 치열하다. 한쪽에선 국익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선 국익을 지키기 위해 파병결정을 철회해야 한다고 맞선다.

"저 미국의 야만 앞에/왜 우리 노리개가 되려는가/국익의 이름으로/더 이상 더러운 침략전쟁에 휘둘리지 말자/아니면 국어사전을 고치자/미국의 이익이 곧 국익이라고." 토요일자 한겨레신문 독자투고란의 '국익의 이름으로'라는 시(詩)는 절규에 가깝다. 과연 국익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느 쪽이 우리의 진정한 국익인가.

윈스턴 처칠은 주권국가의 국제적 행동을 가름하는 열쇠는 국익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그러나 국익의 산술은 간단치 않다. 국익에는 국가정의(正義)와 실리의 양면이 있다. 명분이 서고 실리도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러나 둘 중 하나를 희생시켜야 할 경우도 있고, 단기적으로 손해지만 장기적으로 더 큰 이익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게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이라크 추가파병으로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으면 파병이 곧 국익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득실의 계량화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선 전투병과 비전투병 구분부터가 모호하다. 비전투병도 전투지역에 투입되면 전투병이다. 기습테러 위협이 도처에 널려 있는 상황에서 자기방어 능력이 없는 비전투병 파견은 더욱 위험하다. 인명 희생과 비용 부담은 그렇다 해도 '침략전쟁 동참'에 따른 국가정의의 훼손, 그리고 아랍권의 적대감으로 인한 국가적 손실을 숫자로 가늠할 수는 없다.

파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제정치는 '현찰결제'가 아니다. 파병 대가로 당장 뭘 요구한다면 북한식 외교와 다를 바 없다. 재건사업 참여 등 경제적 이익을 파병 이유로 앞세우면 장기적 국익에 도리어 마이너스다. 주한미군의 재편 연기나 북핵 회담의 진전을 파병과 연계시킴은 더욱 위험하다. 이런 식의 흥정법은 국익이 아닌 국가이기(利己:ego)게임이다. 진정한 국익은 이해관계의 단순한 집적(集積)도, 이들 간의 인위적 균형도 아니며 이런 계산을 뛰어넘어야 한다.

파병 문제는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에 입각해 한.미동맹의 틀속에서 풀어야 한다. 주한미군에 안보를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좁은 이익만이 아니라 한국이 속한 안보동맹의 큰 이익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아랍권 국가치고 주한미군의 존재와 우리의 대미 의존도를 모르는 나라는 없다. 전쟁에 반대한 프랑스와 독일도 명목상은 유엔 주도, 실질적으로는 미국 주도하의 이라크 재건을 지지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악화를 더 이상 원치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과 일본이 침략전쟁에 협조적인 것도 안보와 경제에 문제가 생기면 도와줄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는 현실적 인식 때문이다.

미국의 침략전쟁을 질타함은 자유다. 그러나 외교와 국방 문제를 감성적으로 접근하거나 국내정치 및 이념에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 국익은 국가 간 게임에서 국력(P)=(C+E+M)×(S+W)의 극대화다. C는 영토와 인구등 국가규모, E는 경제력, M은 군사력이다. 이 셋의 합이 유형(有形)의 국력이다. S는 국가전략, W는 이를 따르는 국민의 의지다. 미국이 약소국 월맹에 패한 것은 무형의 국력(S+W)이 거의 제로였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결단을 굳히고 이를 설득해 국민이 따를 때 무형의 국력은 극대화된다. 청와대부터 흔들리고, 파병이 정쟁의 대상이 되면서 주판 굴리기식 국가적 이기가 판치면 국익게임에서 한국은 백전백패할 뿐이다.

변상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