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없는 돈 물건 사두자”(하나의 독일: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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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동독 사재기로 생필품 “매진”/찰리검문소 철거후 여권검사도 안해
역사적인 동ㆍ서독 통화통합이 7월1일을 기해 실시됨으로써 지난 40년간 완강히 지속돼온 동독 공산정권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베를린장벽이 붕괴되면서 시작된 독일통일 작업은 불과 반년만에 경제적 통일을 이뤘으며 이제 금년말 완전통일을 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서독에 흡수되는 형태로 통일되는 동독인들의 입장에선 통일이 반드시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실업ㆍ생활수준의 저하ㆍ서독인들의 동독진출 등 장래에 대한 불안은 통일을 맞는 동독인들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중앙일보 유재식 베를린주재 특파원이 통독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명과 암을 취재,시리즈로 엮는다.<편집자주>
【베를린=유재식특파원】 동서독 통화ㆍ경제ㆍ사회통합을 불과 이틀 앞둔 29일 동서 베를린의 분위기는 큰 대조를 보이고 있다.
서베를린 시민들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대체로 평온한 분위기였지만 동베를린 시민들사이에는 마치 태풍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내린 지역처럼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29일 오전 9시30분 동베를린 중심가인 알렉산더광장에 위치한 첸트룸백화점.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1층 식료품매장 입구엔 긴 행렬이 늘어섰다.
『며칠 있으면 우리 돈(동독 마르크)은 휴지가 될텐데 필요한 물건이나 많이 사둬야지요』­이름 밝히기를 끝내 거부한 40대의 한 가정주부는 벌써 며칠째 이곳에서 생필품을 사고 있다고 말했다.
판매대는 벌써 3분의2이상 텅텅 비어있었다. 고기와 우유ㆍ주류판매대는 몇시간내에 동이 날 정도의 물량만 남아 있었고 치즈ㆍ과일ㆍ화장지는 벌써 매진됐다.
『손님들은 닥치는 대로 물건을 쓸어갑니다. 최근엔 베시스(서독사람)까지 가세해 오전 11시쯤이면 웬만한 물건은 동이 납니다.』 이 백화점 종업원 뎀페르트양(35)은 『아직 ××제품 있느냐』는 고객들의 질문에 『죄송합니다. 떨어졌습니다』를 연발하면서 이같이 설명했다.
식료품 사재기가 극성을 부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7월1일부터 식료품등에 대해 동독정부가 지급하던 국가보조금이 중단되면 값이 치솟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1인당 2천∼6천마르크씩 서독 마르크와 바꾼 나머지돈은 2대1로 교환되기 때문에 그러느니 어차피 필요한 생필품을 많이 사두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같은 백화점이라도 구두ㆍ의류 등을 파는 2,3층 매장은 상황이 정반대다.
「주퍼 프라이스」 「슈타르크 레두치어르트」­굳이 우리말로 바꾸면 「가격 대폭인하」 「파격세일」쯤에 해당하는 말들이다. 대부분의 제품이 40∼60%,심한 것은 70∼80% 할인 판매되고 있다.
7월1일부터 밀려올 서독상품에 비해 질이 형편없기 때문에 빨리 팔아치우기 위해 이처럼 할인판매를 하고 있으나 대부분 고객들은 가격만 확인하고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이 백화점에서 눈길을 끄는 매장은 서점과 신문잡지판매대. 30대이하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베를리너 모르겐 포스트,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등 서독신문을 샀지만,50∼60대의 노인층은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등 동독신문을 샀다.
신문과 함께 전시된 잡지의 이름들은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시장경제입문』 『경영비결』 『자동차』 『절세법』 『서베를린의 모든 것』…,거의 모두가 7월1일부터 달라지는 법체제나 생활환경에 대한 안내서로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젊은 여성들은 패션잡지도 많이 샀다. 바로 이웃한 서점의 여종업원에게 『마르크스,엥겔스에 관한 책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떨어졌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왜 다시 갖다놓지 않았느냐』고 재차 물었더니 짜증스런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책을 요즘 누가 찾습니까.』
오전 11시 백화점앞 분수대광장. 여기저기에 트럭이동판매점이 있었고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우리 시골장터를 연상케 했다.
일본ㆍ서독ㆍ네덜란드 등의 전자제품을 비롯,화장품ㆍ의류ㆍ담배ㆍ마이클 잭슨의 카세트테이프ㆍ포르노잡지 등을 팔고 있었다.
한 블록 건너 베를린시 은행(슈파르카세)앞에는 3백m가량의 긴 행렬이 늘어서 있었다.
줄서있는 30대가량의 한 남자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신규구좌 개설및 입금을 하기 위한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동독정부는 지난 11월부터 30일까지 전국 각 은행과 지점에서 화폐교환에 대비한 구좌개설및 입ㆍ출금 신청서를 받고 있다.
이번 경제ㆍ사회통합으로 14세까지의 어린이가 2천마르크,15∼59세가 4천마르크,60세이상이 6천마르크까지의 현금과 예금을 1대1로 서독 마르크와 교환되기 때문에 이 남자도 부인과 11세된 딸,4세된 아들의 구좌를 개설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린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2시 라트하우스가에 있는 동베를린 시청(로테라트하우스) 앞에서는 시청소속 청소부 3천여명이 2백여대의 청소차를 앞세우고 서베를린 청소부 수준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지난 26일부터 계속되는 이들의 파업시위로 시내 곳곳에는 쓰레기더미가 널려있고 더운 날씨탓에 썩는 냄새가 지독했다.
동서 베를린을 잇는 모든 통행로에서는 며칠전부터(정확히는 찰리검문소가 철거된 22일부터) 독일인은 물론 외국인에게도 여권검사를 하지 않고 있었다.
기자는 이날 아침 택시를 이용,동베를린에 들어갔는데 검문경찰에게 『파스콘트롤(여권검사)?』하며 여권을 제시했으나 손짓으로 그냥 통과시켜 주었다.
이제 동서 베를린,나아가 동서독은 이처럼 정치적 통일과는 별도로 7월1일을 기해 통일에 70%이상 접근하게 된다.
이 역사적 사실을 앞둔 동독시민들의 표정은 그러나 밝지가 않다. 왜일까. 기자는 이들의 고민이 무엇인지를 직접 알아보기 위해 은행앞에 서서 구좌개설을 하던 한 동독시민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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