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시론

민족 우선론과 북한 핵실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그러나 '잘못된 포용'의 시초는 유감스럽게도 YS였다. 1993년 집권하면서 YS는 문민 대통령을 넘어 민족의 지도자로 웅비하려는 욕구가 있었다. 취임사는 김일성에게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그런데 어느 대통령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구절이 튀어나왔다.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아니 민족이 어떤 동맹보다도 낫다고? 그렇다면 북한이 미국.일본보다 낫단 말인가? 보수파는 눈을 부릅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 다음날 한완상 통일부총리(현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취임 회견을 했다. 그는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보다 민족의 통일.화합.행복이 중요하다"고 했다. 또 다른 민족 우선론이었다.

보름 후 드디어 사건이 벌어졌다. YS는 76세의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노인을 조건 없이 북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그는 34년간 복역한 뒤 88년 10월 출소했으나 남한에 연고가 없고 병마에 시달려 북한이 북송을 요구해온 인물이다. 노태우 정부는 상호주의로 줄다리기를 해왔다. 그를 보낼 테니 면회소 설치나 상호 교환 방문 등 이산가족 상봉에 합의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런 중요한 카드를 YS는 그냥 던져버렸다.

이틀 후 북한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이었다. YS는 고민했다. 그는 며칠 후 대화와 협상으로 핵 문제를 푼다는 입장을 정했다. 그러곤 19일 예정대로 이 노인을 북으로 보냈다. 북한은 그와 가족에게 많은 특혜를 주었다. 공산주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면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걸 인민에게 보여주었다. 90년대 중반 북한 인민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빈궁(貧窮) 시련기를 견뎌내는 데 이인모는 효과적인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북한은 핵으로 달려갔고, YS는 자신의 오판을 깨닫기 시작했다. YS는 8.15 경축사에서 "핵을 쥔 손하고는 악수할 수 없다"고 했다. 그해 12월엔 한 부총리를 경질했다.

취임사 준비위원이었으며 YS의 교육문화수석을 지낸 김정남씨는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라는 구절은 남한 국민이 아니라 김일성 주석에게 한 얘기라고 설명한다. "당신들이 믿는 동맹인 소련.중국도 결국 우리와 수교했다. 믿을 건 역시 같은 민족인 남한"이라는 메시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구절은 북한과 친북세력이 애용하는 민족 우선론을 키워주는 데 기여했다.

DJ와 노 대통령은 YS의 값비싼 실수에서 교훈을 얻어야 했다. 북한을 길들이기 위해선 상호(相互)와 동맹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아야 했다. 그러나 DJ와 노 대통령의 학습효과는 부족했다.

DJ는 대체로 한.미 동맹을 지켜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상호'를 관철하진 못했다. 그는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4억5000만 달러를 주었지만 그만큼 받아내진 못했다. 개성공단.금강산.경의선 등이 있었지만 북한은 커튼의 뒤편에서 핵 개발을 밀고 나갔다. 또 60여 명의 비전향 장기수를 북에 보냈지만 우리의 국군포로.납북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상호'에도 실패하고 동맹도 제대로 지켜내질 못했다. 북한의 가혹한 형법은 꿈쩍 않는데 멀쩡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 했다. 북한은 핵 개발을 하는데도 전작권 환수에 매달렸다.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는 친북.반미 세력으로부터 맥아더 동상도, 평택기지도 지켜내는 데 소극적이었다. 그렇게 감싸왔던 북한이 핵실험을 한 이상 늦었지만 대통령이 인식을 바꿔야 한다. 이제는 국가의 명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진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