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도 두손 든 '과학수사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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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 시신으로 보이는 물체가 발견됐습니다."

7월 23일 점심 무렵. 서울 방배경찰서에 40대 남성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프랑스인 밀집 거주지역인 서초구 서래마을의 80평형 빌라에 사는 프랑스인 쿠르조(40)가 한국인 직장 동료의 도움을 빌려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내용의 엽기성 때문에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던 '서래마을 영아유기'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 DNA 분석의 위력=신고 직후 강력팀 형사 7명이 현장에 급파됐다. 냉동고에는 몸을 웅크린 채 꽁꽁 얼어있는 시신 두 구가 탯줄이 달린 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다음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시신의 상태를 정밀 분석한 결과 '태어난 지 일주일도 안 된 영아'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영아의 부모가 누구인지는 미스터리였다. 경찰은 집 안에서 부모의 DNA를 검출할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화장실 등지에서 쓰고 버린 귀이개.빗.칫솔 등을 찾아내 국과수에 감식을 의뢰했다.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를 받던 쿠르조는 7월 26일 오전 프랑스로 재출국했다.

하지만 그날 오후 대반전이 일어났다. 국과수에서 "DNA 분석 결과 쿠르조가 죽은 아이들의 아버지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경찰에 통보했다. 경찰에 "성급하게 사건 관련자를 해외로 내보내 사건이 미궁에 빠졌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8월 7일. 국과수의 두 번째 DNA 분석 결과에 세상은 또 한번 경악했다. 두 아이의 엄마가 쿠르조의 부인인 베로니크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국과수 감식 결과 쿠르조 집의 귀이개, 빗에서 채취한 베로니크의 유전자와 시신의 유전자에서 모자 관계를 확인했다. 경찰은 쿠르조 부부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이들의 귀국을 종용했다. 쿠르조는 "내 아기가 아니고 모르는 일"이라며 버텼다.

◆ 발로 뛴 현장수사의 개가=경찰은 명예회복을 위해 탐문수사에 매달렸다. 때마침 경찰은 서래마을 주민으로부터 "베로니크가 자궁 적출 수술을 받았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서초구와 동작구 일대 산부인과를 샅샅이 뒤진 끝에 강남성모병원에서 베로니크의 수술 집도의를 만났다. 자궁 샘플을 채취해 8월 17일 국과수에 유전자 분석을 의뢰했다. 결과는 'DNA 일치'였다. 이에 쿠르조 부부는 22일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 DNA 분석 결과는 믿을 수 없다"며 "프랑스에 남겠다"고 말했다.

프랑스 언론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프랑스 수사당국도 한국에 형사 사법공조를 요청했고 9월 11일 수사기록과 유전자 검사보고서 등이 프랑스에 전달됐다. 28일에는 시신 DNA 샘플도 프랑스 당국에 전해졌다. 유전자 분석 결과는 한국과 동일했다. 결국 쿠르조 부부가 이달 10일 프랑스 경찰에 긴급체포되면서 사건은 미궁에서 빠져나오고 있다. 이제 프랑스 경찰은 이번 사건을 부부가 짜고 저질렀는지, 아니면 부인이 단독으로 벌인 범행인지를 가려내야 한다.

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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