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후 후원자는 라이스 미 국무장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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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유엔 사무총장으로 사실상 당선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左)이 지난달 22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 참석해 코피 아난 현 사무총장(右)과 악수하고 있다. [뉴욕 AFP=연합뉴스]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에 사실상 확정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 인물이 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다. 세계 최강국 미국의 외교.안보 책임자이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최측근이 반 장관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시작은 지난해 11월 경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때였다. 외교소식통에 따르면 라이스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반 장관에 대한 깊은 신뢰를 표시하며 "나는 물론이고 부시 대통령이 반 장관을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라"고 말했다. 반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출마설이 조심스럽게 나오기 시작했을 무렵의 일이다.

올해 7월 28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계기로 이뤄진 한.미 외무장관 회담에서 반 장관과 라이스 장관은 회담 시간의 절반인 15분 동안 배석자 없이 대화를 나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1차 예비투표에서 반 장관이 1위를 차지한 지 3일 뒤였다.

라이스 장관은 축하의 뜻과 지지 의사를 밝혔다. 안보리 표결의 거부권을 가지고 있는 상임이사국 미국의 승인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미국은 1996년 거부권을 행사해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당시 유엔 사무총장의 연임을 막고 코피 아난 현 사무총장 선출을 주도한 바 있다.

지난달 15일 한.미 정상회담장. 부시 대통령은 반 장관을 만나자 "행운을 빈다(Good luck to you.)"고 인사말을 건넸다. 회담 직전 안보리 2차 예비투표에서 반 장관이 또다시 1위를 차지했고, 부시 대통령이 이를 보고받은 상태였다.

오찬 때에는 사무총장이 되려는 이유를 직접 물었다. 반 장관의 대답을 들은 부시 대통령은 "적절한 사람(Right man)"이라며 "잘 지켜보겠다(I will be watching you.)"고 했다. 부시 대통령이 이렇게 반 장관에 대해 우호적 관심을 표시한 데는 평소 라이스 장관의 칭찬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지난달 말 차기 유엔 사무총장 선출을 신속히 진행하자고 안보리에 제의했다. 예비투표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반 장관의 입지를 굳혀주는 중요한 장면이었다.

두 장관이 친분을 쌓기 시작한 것은 2001년 가을. 반 장관은 유엔총회 의장(한승수 당시 외교부 장관) 비서실장, 라이스 장관은 부시 대통령의 보좌관이었다.

반 장관은 부시 대통령과 라이스 장관이 유엔본부에 오면 총회 의장이 쓰는 방 중 하나를 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전례가 없던 일에 라이스 장관은 고마움을 표시했고, 이후 두 사람은 마주칠 때마다 시시콜콜한 얘기도 하는 친밀한 사이가 됐다.

라이스 장관은 반 장관을 종종 "진짜 신사(such a gentleman)"라고 주변 사람에게 소개한다. 미 행정부 관리들에게 "반 장관의 말은 정확하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외교부 관계자는 "반 장관의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과 행동을 라이스 장관이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다"며 "두 사람 사이에 좀 특별한 화학적 반응이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고 말했다.

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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