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통신] "수석들도 李실장 눈치 봤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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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간 노무현 대통령의 오른팔 참모였던 청와대의 이광재 국정상황실장이 사표를 냈다.

수리 여부는 盧대통령이 아태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갔다 돌아오는 24일께 결정한다고 한다.

하지만 李실장이 사의를 밝히기 직전 본관에서 盧대통령을 독대한 것으로 알려져 이미 대통령의 허락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李실장과 함께 盧대통령을 오랫동안 보좌하며 권력의 최정상에 서게 만든 청와대 내 386 참모들은 19일 새벽까지 끼리끼리 모여 "안타깝다" "마음이 아프다"며 연신 소주잔을 기울였다.

이날 밤 오고 간 얘기들을 재구성해 본다.

▶술자리 1/관망="왜 신당에선 우리들을 타깃으로 삼을까." "생각해 봐. 신당의 대선 공신 의원들이 청와대에 행정관 한명을 제대로 집어넣지 못했잖아." "천정배 의원은 정말 충정이라고 하더라." "하긴 호남 출신인 千의원이야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 盧대통령을 도왔는데 지지율이 10%대로 추락했으니 그럴 만해." "신당에선 뭔가 盧대통령과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드는 이유를 李실장 때문이라고 본 것 같아." "386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신당 의원이 40명이 넘었다더라."

▶술자리 2/억울함의 분출="그래도 권력과 정보를 李실장이 모두 독점했다는 건 과장된 것 아니냐." "결국은 자리 때문 아닐까. 신문 한줄 안 읽어도 되는 청와대 자리도 있지만 그 자리(국정상황실장)야 어차피…." "그런 자리에 있으면 웬만큼 잘하지 않고는 누군들 그런 적대적 공격을 막아내기 쉽지 않을 거야." "재신임 등 노통의 상황도 어려운데 신당에서 현명치 못했던 건 아닐까." "당장 내년 총선의 의원직들이 걱정스러운 상황일 텐데 뭘." "권력이란 원래 끊임없이 희생양을 찾는 거야."

▶술자리 3/체념과 수용="광재형도 좀 빌미를 제공하긴 했어." "인사위원회에서 너무 적극적인 의견 개진을 해 말이 많았던 모양이야." "수석.보좌관들이 李실장 눈치를 보는 분위기라는 얘기도 돌았잖아." "어쨌든 대통령에게 누가 된다면 사표를 낸 게 잘한 것 같아." "차라리 일주일 전에 냈으면 좋았을 텐데." "광재형은 그만두면 미국 스탠퍼드대로 몇달 연수를 갈 모양이던데." "하긴 밖에서 도우면 비선정치라고 할테니." "이제 우리는…."

李실장의 사표는 盧대통령 보좌 구도의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구심점'이 사라진 386 참모들의 영향력도 감퇴하게 됐다. 무엇보다 '대통령을 만든 사람'과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이 이젠 구분돼야 한다는 새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역대 대통령의 집권 후 문제점은 주로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에게서 파생해 왔다. 정치자금 등 진흙수렁의 대선가도에서 이들이 감내했던 '봉사와 희생'은 집권 후 '통치의 부담'이라는 동전의 양면이 돼 왔다.

'실세 측근'이란 꼬리표 자체가 시스템 가동에 짐을 주는 시대가 된 셈이다. "대통령께 힘과 용기를 주길 빈다"며 사표를 제출한 李실장의 씁쓸한 사례가 다시금 반복되지 않을 새 정치문화를 기대해 본다.

최훈 청와대출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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