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민족주의 지고 이슬람 정치운동 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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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아랍 민족주의는 물러가고 이제 이슬람 정치운동이 뜨고 있다'.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의 강력한 군사력에 맞서 저항에 성공하면서 이슬람 정치운동이 중동의 정치적 대안으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알자지라 방송은 "14일 발효된 휴전 직후 모로코에서 인도네시아까지 중동 전역에서 열린 종교집회에서 '이슬람=해결책'이라는 구호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고 19일 전했다. 뉴욕타임스도 20일 "헤즈볼라가 승리했다는 정서가 확산되면서 이슬람 정치운동이 득세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 50년간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항하는 데 실패한 '아랍민족주의'는 퇴조하고 이슬람주의가 득세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1952년 혁명으로 집권한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이념화에 성공한 '범아랍민족주의'는 실제로는 '허황된 약속'임이 드러났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아랍권은 침묵했다. 오히려 분열이 가속화돼 일부 아랍국은 미국에 군사기지를 내주었다. 레바논 사태에 있어서도 아랍국은 적극 개입보다는 공허한 '말잔치'만 벌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사태 초기에 이스라엘 병사를 납치한 헤즈볼라가 "군사적 도발을 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개 무장단체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군함에 미사일을 명중시키고, 이스라엘 북부에 4000여 발의 로켓을 발사했다. 남부의 지상전에서도 100여 명의 이스라엘군을 사살했다. 무능력하고 분열된 아랍민족주의에 실망한 무슬림들이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시아파뿐이 아니었다. 해묵은 종파 간 반목으로 헤즈볼라를 시기하던 수니파도 박수를 보냈다. 헤즈볼라의 성공은 또 느슨한 아랍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장기집권을 꾀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아 온 중동의 독재정권에 큰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전쟁 전에도 교육.보건.의료사업을 추진했던 헤즈볼라는 전후 복구에 있어서도 레바논 정부보다 적극적이다. 정부는 복구계획을 마련하고 있지만 헤즈볼라는 이미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1만2000달러(1100만원)를 지급했다. 무관심한 정부에 대한 대안으로 이슬람 단체들이 중동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반서구 투쟁의 상징 알카에다는 이미 중동 전역에 이념으로 확산하고 있다. 2005년 총선에서 88석을 획득한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 지난해 집권당이 된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은 정치단체로 급부상했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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