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63. 여의사회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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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83년 11월 서울 도화동으로 이전한 한국여자의사회 회관의 현판식에 참석한 필자(오른쪽에서 다섯째)와 역대 여의사회 회장들.

1982년 나는 제13대 한국여자의사회 회장이 됐다.

56년 발족한 여의사회는 올해로 반세기 역사를 맞았다.

여의사회는 서울 봉천동 등 국내 영세민 거주 지역을 돌며 무료 진료와 봉사 활동을 활발히 펼쳐왔다. 대대적인 가족계획사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여의사회의 활동상이 널리 알려지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나는 회장에 취임한 뒤 여의사회 조직.기능의 전문화를 꾀했다. 그리고 우리 사업의 홍보에 힘을 쏟았다. 사업위원회.장학위원회 등 일곱 개의 분과위원회를 조직하고, '여의회보'를 창간했다. 여의회보 교정쇄(校正刷)가 나오면 뿌듯한 마음에 회관으로 달려가 새벽까지 회보 내용 확인 작업에 매달렸다. 회원들의 모금으로 마련한 서울 삼성동 회관이 낡아 83년 서울 도화동에 새 회관을 지었다.

여의사들의 활동 무대를 세계로 넓히는 데도 앞장섰다. 83년 여의사회 정기총회 때 일이다. 나는 국제여자의사회를 한국에서 열자는 의견을 냈다. 그러자 회원들 대부분이 "우리가 어떻게 국제회의를 치를 수 있겠느냐"며 무모한 구상이라고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차츰 내 제안이 공감대를 넓혀가면서 84년 여의사 64명으로 '국제여자의사회 유치단'을 구성해 캐나다 밴쿠버로 보냈다.

여권 받기가 어려웠던 때라 정부는 "여자들이 왜 이렇게 많이 외국에 나가느냐"며 난색을 보였다. 우리는 "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국제회의를 유치하러 간다"고 설득해 겨우 떠날 수 있었다. 우리는 유치에 성공, 87년 김구자 회장 때 제21회 국제여자의사회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었다. 전임 회장이었던 주양자씨가 대회장을 맡아 각국 여의사 1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공적으로 치뤘다.

박양실 전 보사부 장관이 제16대 회장으로 취임한 뒤 "선생님, 제게 선물 하나 주세요"라며 내게 요청했다. 여의사회에서 '여의(女醫)대상'을 제정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여의사회가 주는'길 봉사상'이 탄생했다.

여의사회는 91년 첫 시상식을 열어 복지시설 애민원의 조수정 원장(의료 부문) 등에게 길 봉사상을 수여했다.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10돈쭝 금메달, 상금 1000만원을 주고 있다.

회원 650명으로 출범한 여의사회는 지금 1만3000여 명이 참가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뛰어난 업적으로 이름을 날린 회원도 많다. 김정태 박사는 71년 세계보건기구(WHO) 자문관으로 일했다. 제9대 회장인 김동순씨는 '가족계획을 위한 전국여자의사 대회'를 성대하게 개최했고, 후임 권분이 회장은 국제가족협회에서 30만 달러 받아 대대적인 가족계획사업을 펼쳤다. 이어 주일억 회장은 제22대 국제여자의사회장을 지냈다. 박경아 연세대 의대 교수는 차기 국제여자의사회 회장 후보이다. 박양실.주양자씨는 보사부 장관을 역임했고, 구임회.신영순.박금자.안명옥 회원 등은 국회에 진출했다. 박귀원 현 회장(서울대 의대 교수)은 여의사회의 더 큰 발전을 위해 활약하고 있다.

내가 미국에서 수련할 때 미국 여의사들조차도 '차별'을 받던 기억을 떠올리면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한국사회의 당당한 축으로 우뚝 선 우리 여의사들이 자랑스럽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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