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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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독재자 마르코스의 장기집권을 허물어뜨리고 민선정부를 출범시킨 아키노 필리핀대통령이 3년만에 진퇴위기를 맞고 있다.
이번 위기는 아키노정권의 등장 초기부터 분열상을 보여온 필리핀정부지도부가 개혁에 이렇다할 실적을 내놓지 못한데서 온 일종의 자업자득이란 측면이 없지 않다.
현실 정치에 미숙하고 균형잡힌 지지기반을 갖지못한 아키노로서는 과거 독재청산에 필요한 고도의 정치술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태의 흐름에 밀려왔다. 필리핀 개혁의 핵심이 되는 토지개혁 문제만해도 그는자신의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땅을 내놓는 것과같은 극적인 제스처를 해보였지만 대부분이 대지주로 구성된 의회의 반대와 방해로 이 문제를 처리하지 못해 농민들의 불만을 샀다.
필리핀의 치안을 위협하는 공산게릴라 「신인민군」 문제에 대해서도 현실감각을 갖지 못해 평화협상에 우선순위를 둠으로써 초기부터 군부의 반발을 샀다.
아키노대통령은 또 마르코스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경제난국을 해소하는데도 무력했다. 결국 마르코스의 장기 독재에 대한 증오심이 불러일으킨 민의로 권좌에 오른 아키노는 그 거대한 민중의 힘을 민주개혁의 방향으로 결집시키는데 실패한 것이다.
여기서 생겨난 권력의 춰약점은 결국 군부의 정치개입에 구실을 마련한 것이다. 87년 처음 쿠데타를일으켰던 호나산대령이 뒤이어 6차례나 쿠데타를 반복 시도하도록 방치한 것은 아키노 자신이 군부를 장악하지 못한데서 1차적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부통령인 라우렐이 집권 1년만에 야당을 조직하고 대통령을 기회있을때마다 비난했고 뒤로는 군부의 쿠데타를 은밀히 지원해 왔다는 설은 아키노정권이 지금 당하고있는 쿠데타위협이 거의 필연적 결과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필리핀 쿠데타에서 우리는 군사독재를 청산하고 개혁을 통해 국민들로부터 정통성을 얻어내는 작업이 얼마나 어러운 일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첫 교훈은 개혁세력이 모든것에 우선해 해야할 일은 반개혁세력을 초기에 제압할 수 있는 국민적 지지기반을 쌓아야 된다는 점이다. 그렇지 못할경우 필리핀에서 보는것과 같은 반민주세력의 반격을 자초하게 된다. 이번사태의 주 원인은 정치권의 실패에 있다.
두번째 교훈은 국내 정치에 좋은쪽이든 나쁜쪽이든 간에 외세를 불러들이는 것을 국민들은 용납하지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쿠데타 진압에 미군기가 제공권을 제공했다는 소식에 대해 필리핀 국민이 반감을 보이고 있는것은 그동안 변한 국제정세에 힘입어 필리핀 국민들도 더 이상 외세의존을 용납하지 않게 되었다는 반증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번 필리핀 사태가 민간정부의 승리로 마무리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동시에 아키노정권도 이번기회에 개혁작업에 생사를 걸고 나서야되고 미국 도움으로 정권유지를 시도함으로써 필리핀 국민의 민족감정을 욕되게 하는것은 결국 정권의 정통성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될수 있음을 깨닫게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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