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시론] 재신임 관건은 改革패키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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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임기가 사실상 보장돼 있는 대통령제하에서 대통령이 집권 8개월 만에 재신임을 묻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왜 노무현(盧武鉉)대통령은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게 됐을까.

盧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이유는 최도술 전 청와대 비서관의 정치자금 수수 비리 문제를 포함해 그동안 축적된 국민의 불신과 정권의 도덕성 상실로 더 이상 국정을 이끌어나가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국민에게서 심판을 받아야 하며, 국민이 재신임해 주면 사면받은 대통령으로서 다시 출발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인이 아닌 측근의 비리에 대해 대통령직을 걸고 재신임을 묻는다는 것은 지나친 도덕적 결벽증일 뿐 아니라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재신임을 둘러싸고 일어날 소모적 국론 분열과 재신임에 실패할 경우 발생할 헌정의 위기를 모를 리 없는 盧대통령이 단순히 정권의 도덕성 회복을 위해 재신임을 묻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재신임을 묻게 된 근원적인 문제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盧대통령이 언급한 "전체 정치구도" "정치문화의 환경"의 문제다. 盧대통령은 거듭되는 대통령제의 위기를 극복하고 한국 정치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재신임이라는 정치적 모험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분할 정부 (divided government), 즉 여소야대 정부가 일상화됐다. 대통령과 국회가 다른 정치세력에 의해 장악됨으로써 국정의 교착상태가 일상화됐던 것이다. 소위 3金시대에는 이러한 분할 정부의 문제로 인한 국정교착을 풀기 위해 합당, 의원 빼내오기 등 인위적인 정계개편을 통해 여대야소로 바꾸어 놓거나 국가정보원과 검찰 등 권력기관을 이용해 야당을 견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해 왔다.

노무현 정부하에서도 극단적인 여소야대가 재현됐다. 거기에 더해 노무현 정부는 대통령직 탈권위주의화의 일환으로 권력기관을 정치에서 독립시켰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盧대통령이 국회를 완전 장악하고 있는 거대 야당에 맞서 국정을 운영하기 위해 의존할 수 있는 힘은 참여정부의 도덕성과 국민의 지지밖에 없었다.

그런데 잇따른 국정의 난맥상이 노출되면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추락하고, 급기야 측근의 비리가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되면서 盧대통령은 마지막 남은 밑천인 도덕성마저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4년 넘게 남은 임기 내내 국정 혼란이 계속돼 참여정부는 식물정부가 될 것이고 盧대통령은 실패한 대통령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盧대통령은 분할 정부하에서도 국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구도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개인적인 신뢰 회복과 정치문화의 환경을 바꾸기 위한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적 위임을 얻기 위해 盧대통령은 재신임이라는 카드를 던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재신임을 얻기 위해 盧대통령은 지난 8개월의 국정 운영에 대한 통렬한 자기 반성과 함께 측근의 비리에 대해 용서를 빈 뒤 새로운 정치를 위한 개혁 패키지를 제시하고 이를 재신임과 연계해야 할 것이다.

정치개혁 패키지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개혁안은 깨끗한 정치를 위한 정치자금 개혁이다. 이는 정치권 전체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정치인 중 정치자금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게 통념이다.

먼저 대통령부터 정치자금에 관한 고해성사를 하고 여야를 막론하고 과거의 정치자금을 밝히게 한 뒤 대사면을 하고, 새로운 정치자금 개혁안을 제시해 모든 정치인이 깨끗이 씻은 손으로 깨끗하고 투명한 정치를 해 나가자고 제의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여야 공존의 정치, 정책 경쟁의 정치를 위해 분열적 지역구도의 정치를 타파하기 위한 선거구제의 개혁이 정치개혁 패키지에 포함돼야 할 것이다. 분열적 지역주의야말로 분할 정부를 계속 출현시키고 여야 간의 소모적 정쟁을 지속시켜 온 주범이다. 지역주의 해소를 위한 개혁은 소수파 대통령이 국정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임혁백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