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엔 `둘도 많다` … 지금은 `제발 하나라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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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아, 니가 우리 집안 대를 끊겠다는 것이여? 직장이고 뭐고 다 필요없응께, 니 죽고 나 죽자."

1980년 초 어느 날 대한가족계획협회(현재의 인구보건복지협회) 전북지부 사무실. 협회 직원이던 신동진씨는 갑자기 사무실로 뛰어든 노모에게 멱살을 잡혔다. 신씨는 두 형이 요절하는 바람에 외아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결혼 후 딸을 낳은 지 석 달 만에 정관수술을 받으려 하자 어머니가 펄쩍 뛰며 화를 낸 것이다. 그날 저녁 신씨는 장인에게도 불려갔다. 그는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신씨는 결국 2년 뒤 아들을 낳고야 피임시술을 받았다. 68년 협회에 입사, 우리나라 가족계획운동의 '산증인'인 신동진(60) 저출산대책사업본부장 얘기다.

"당시 협회 직원들의 사명감은 대단했어요. '출산 억제=애국=인류 구원의 희망'이라고 믿었죠. 저 때문에 정관수술 한 친구도 많았어요. 그런 제가 이제 애 낳자고 하고 다니고 있으니…. 친구들이 요즘 저더러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위선자''양심 없는 놈'이라고 합니다."

1960~70년대 농촌에서 피임 홍보활동을 잘못하다간 몰매를 맞기 쉬웠다. 특히 일선 가족계획 요원들의 고충은 엄청났다. 요원들에겐 피임시술 목표량도 있었다. 성과가 좋지 못하면 더 깊은 오지나 벽지로 발령 나기 때문에 필사적이었다. 이들은 마을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모기약.구충제.밀가루 등을 갖다줬다. 조금 친해진 뒤에야 콘돔이나 정관수술 얘기를 슬그머니 꺼냈다. 정관수술을 하면 '내시처럼 된다'고 생각한 남자들에게 혼이 나기 일쑤였다.

이런 일선 요원들의 애환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신 본부장이 협회 홍보위원이던 한 드라마 작가에게 얘기해준 게 계기가 됐다. 80년대 중반 방영된 KBS 일요 아침드라마 '해 돋는 언덕'은 탤런트 차화연씨가 주인공인 가족계획요원 역을 맡아 시청률도 제법 높았다고 한다.

"세상 참 많이 바뀌었어요. 사실 61년에 나온 우리 협회 설립 취지서의 첫 구절이 뭔지 아세요? '가족계획운동이 지향하는 바는 대체로 불임증 부부에 대하여는 임신을 도모하며…'로 시작돼요. 그때도 불임부부 지원이 가장 먼저 언급돼 있다고요. 이제야 생명존중운동이란 가족계획운동의 기본 취지에 충실하게 되는 거죠."

신 본부장은 그러나 "가족계획사업이 새마을운동과 결합돼 성공하기까지 10년 이상 걸렸다"며 "저출산대책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회적 여건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에 역점을 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아이 하나 낳기도 꺼리는 젊은 부부들에게 셋째 출산 시 주는 지원금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제 딸도 '결혼하면 꼭 아이를 낳을 필요가 있느냐'고 하는데 할 말이 별로 없다"며 "정부 정책도 중요하지만 협회도 임신이나 출산을 행복하게 느낄 수 있도록 사회 분위기를 이끌어 보겠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 송상훈 팀장, 정철근.김정수.김영훈.권근영 사회부문 기자, 염태정.김원배 경제부문 기자, 김은하 탐사기획부문 기자, 조용철 사진부문 부장, 박종근 사진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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