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기자의뒤적뒤적] 흑인 왕이 쓴 여행비가 르네상스 돈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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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3

래리 고닉 지음, 이희재 옮김, 궁리

"방학이 싫다"는 엄마들이 의외로 많습니다.(아빠들은 거의 그런 소릴 안 합니다.) 전업주부든, 맞벌이든 자녀를 돌보는 부담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끼니며 방학과제 챙겨야죠, 종일 뭘 하는지 살피며 공부도 채근해야죠, 방학은커녕 특근체제로 돌입해야 할 판입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매일 학교 가는 부담은 없어졌지만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몸부림칩니다. 그러니 재미있고 알찬 방학, 이건 학생이 있는 가정의 큰 숙제입니다.

이런 고민을 덜어줄 책을 소개합니다. 만화책입니다. 익살스러운 그림과 대사로 처리한 것이 일단 아이들의 맘에 들 겁니다. 거기다 세계사의 흐름을 꿰뚫는 내용이 제법 진지하고 생각거리를 던져 주기에 부모의 눈에도 찹니다. 스테디셀러인 '먼 나라 이웃나라'를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르네상스의 자금줄이 실은 서아프리카 말리 왕국의 만사 무사 왕이 메카로 순례를 가면서 흥청망청 쓴 돈이었다는 등 역사의 뒤안길을 걷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총성이 끊이지 않는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가, 8세기 말 칼리프 알 만수르가 건설했을 당시 이름은 '평화의 도시'였답니다. 지중해의 대서양 출구인 지브롤터는 8세기 스페인을 정복한 아랍군의 지휘자 타리크의 이름을 딴 제벨 알 타리크(타리크의 바위)가 변한 것이고요.

역시 8세기 아랍의 대학자 무하마드 이븐 이스하크는 한 학생의 논문을 평가하면서 "이건 수의사가 손을 좀 봐야겠구먼"이란 명언을 남겼답니다. 말 풍선엔 "한마디로 개똥이라 이거여"란 대사가 담겼습니다. 그가 요즘 우리 높은 분의 논문 표절 소동을 보면 뭐라 했을까 하는 생각도 얼핏 드네요.

철학적인 대목도 눈에 띕니다. 50년에 걸쳐 스페인을 통치했던 아브드 알 라흐만이 962년 숨을 거두면서 "내가 진정으로 행복을 느꼈던 날이 며칠이나 되는지 헤아려 보니 겨우 14일이었다. 그러니 세상사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지어다"라고 술회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모두 여느 세계사 책에선 만날 수 없는 구절들이죠.

지은이는 미국 하버드 대학원에서 수학박사 과정을 밟다 홀연히 논픽션 만화가로 전업한 괴짜입니다. 역사, 과학 만화로 정평이 나 있는데 '세계사 만화 시리즈'는 예일 등 명문대학에서 부교재로 활용될 정도라네요. 국내에선 1990년대 초 1, 2 권이 번역돼 나와 아는 사람들만 즐겼습니다. 후속편이 없어 아쉽던 차에 올봄부터 재간했고 이 책은 이슬람에서 르네상스까지 다룬 제3권입니다. 중학생 정도가 한 사흘은 뜻 깊고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시리즈입니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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