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영어교육 새 판을 짜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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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무엇보다 먼저 현재 운영되는 초.중.고 영어교육이 우리 사회의 영어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고,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우상을 버려야 한다. 현 학교 영어교육은 국가 외국어교육 정책에 의해 마련됐다. 국가의 영어교육 정책은 영어를 '외국어'로 규정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과거나 현재나 영어교육의 본질엔 큰 차이가 없다. 학교에서 일주일에 서너 시간 영어의 씨를 뿌려 주고 물과 햇볕을 공급해주지만, 충분치도 못하고 이를 받쳐 주는 토양 또한 척박하다. 영어 교실에 영어가 없고, 교실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말과 우리글에 짓밟혀 제대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그것이 우리가 싱가포르나 북유럽 나라들과 다른 점이다. 반면에 많은 국민은 영어를 모국어에 버금가는 '제 2언어'로 배우고 구사하고 싶어 한다. 영어 공용어 논란에서 보는 것처럼, 여기에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있으며, 학교 영어교육의 한계가 존재한다.

우리는 1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영어를 배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10년 동안 영어를 배우지 않았다. 학교 영어교육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700여 시간이 전부다. 하루 8시간씩 집중해 배우면 100일이면 충분한 시간이다. 그 시간을 10년에 걸쳐 제공해 왔다. 수도꼭지에서 물을 한 방울씩 똑똑 떨어뜨리는 방식이다. 그마저도 듣기.말하기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읽기.쓰기를 모두 가르치고 배운다. 골고루 나누다 보면, 듣기.말하기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400시간도 안 된다. 제한된 시간을 이리저리 나누다 보니, 듣기.말하기는 조금 하는 것 같은데, 읽기나 쓰기가 부족하다. 영어능력에서도 풍선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나 대학에서 기대하는 영어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취직하기 위해 또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개인은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조기영어교육에 대한 우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일 뿐 과학적 사실은 아니다. 어린이들은 태어나 만 4세까지 최소 9000시간 이상 자신의 모국어에 노출된다. 하루에 수많은 상황에서 자신의 모국어를 듣고 말하는 상황에 부딪힌다. 그것도 읽거나 쓰는 활동은 하지 않으니, 오로지 듣고 말하는 데만 그 엄청난 시간과 기회를 갖는 셈이다. 미국 대학에서 진행된 연구에 의하면, 8~9세에 미국에 이민을 가서 미국 원어민 학생들과 비슷한 수준의 학업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최소 5~7년 이상 영어 노출이 필요하다고 한다. 캐나다는 모국어 수준의 프랑스어 교육을 위해 필요에 따라 학교에서 약 5000시간 이상의 프랑스어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조기에 배우면 잘할 수 있고, 다른 언어를 단기간에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은 우상에 불과하다.

이제 우리가 던져야 할 근본 문제는 우리 사회가 영어를 어떻게 받아들여 사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질문은 국가가 답해야 할 것인 동시에, 우리 개개인이 답해야 할 질문이다. 그래야 새로운 대안이 가능하다. 현재는 이 질문에 대한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 않으며 국가도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영어를 둘러싼 논란과 사회적 비용을 감안하면 가급적 빨리 국가나 개인은 선택을 해야 하며, 그에 따른 적절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는 한 영어는 언제나 개인의 몫으로, 그리고 부모의 경제적 부담으로 남을 것이다.

이병민 서울대 교수·영어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