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있는이야기마을] 나물 행상 울 엄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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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생신 전날 아침 서둘러 친정으로 향했습니다. 행여 늦으면 당신께선 아픈 다리를 이끌며 상을 차리실 게 분명합니다. 지난해 생신에도 꾸물거리다 늦게 도착했더니 미역국은 물론 자식들 좋아하는 밑반찬까지 해놓은 어머니셨습니다. 마루에 출렁이는 햇살을 보니 마침 점심참인데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비상시를 대비해 사드린 휴대전화도 문갑 위에 있는 것이 어디 먼 데 가신 것 같지는 않은데 옆집 명자네 할머니 말씀은 퍽 의외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요새 나물장사에 재미를 들여 하루 걸러 읍내 장으로 행보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새 사람들은 뭐든 싱싱한 걸 찾는다며 어제 온 종일 캐온 나물을 아침부터 내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못난 마음에 은근히 부아가 납니다. 지난해 봄 관절염 수술을 받은 후 거동조차 수월치 않은 당신이거늘, 자식들이 얼마나 변변치 못하면 그럴까, 명자 할머니 얼굴에 그렇게 씌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어머니는 저녁 때가 다 돼서야 돌아오셨습니다. 막내딸 지청구 꼬리는 뚝 잘라 드신 채 뒷산에 원추리가 벌써 나왔더라, 냉이뿌리가 얼마나 실한지… 봄나물 예찬에 바쁜 당신입니다.

어머니는 재 너머 샛말아재네 고추 밭에 지천인 냉이를 그저 지나치지 못하셨겠지요. 한겨울 혹한을 이겨낸 실한 뿌리는 보약과 같다며 하루 종일 고추 밭에 엎드려 계셨을 게 분명합니다. 생각보다 건강해 보이는 어머니 얼굴에 안도하면서도 아픈 다리로 읍내까지 팔러 다니신 건 여전히 못마땅합니다. 다리 아프고 허리 굽은 노인네가 버스를 기다리며 신작로 가에 오도카니 서 있는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 한쪽이 한겨울처럼 시린걸요. 또 유난히 수줍음 많은 당신은 지나는 손님을 불러 세울 재주조차 없는걸요.

"원추리가 본디 근심을 잊게 해주는 나물이여. 끓는 물에 후다닥 데쳐서 고추장이나 된장, 들기름 좀 넣고 조물조물 무치믄 맛나고 세상사 시름도 덜고 두루 인간에 이로운 나물이여."

생신상을 물리자마자 자식들 올려보낼 채비에 여념 없는 당신, 장에 내다 판 줄 알았는데 어디서 내오셨는지 물에 적신 베 보자기 덮은 함지엔 봄나물이 넘쳐납니다. 아, 당신의 체취 같은 봄나물 냄새! 진초록빛의 냉이와 연두색 원추리는 한동안 우리 집 식탁에 오르며 환절기 우울증도 달래주고 까칠해진 미각도 돋워주고 냉한 수족도 다스려주겠지요. 감사합니다, 어머니.

공지숙(37.주부.인천시 병방동)

◆ 4월 7일자 소재는 '성묘'입니다

분량은 1400자 안팎. 성명과 직업.나이.주소.전화번호를 적어 4월 4일까지로 보내주십시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원고료를 드리며, 매달 장원을 선정해 LG 싸이언 휴대전화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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