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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은 다 이민자나 그 자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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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래서 과거 미국의 한 대학에서 1년간 연수를 했을 때 취득한 번호를 알려 줬다. 그러자 수화기에선 "컴퓨터에서 확인이 안 된다. 신분증을 가지고 직접 오라"는 응답이 나왔다. 미국 정부가 발급한 SSN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했으나 상대방은 "아무튼 전화로는 신원을 알 수 없으니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고 했다. 낯선 곳을 찾아가는 게 귀찮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연수 중인 아내에게 부탁했다. "당신의 SSN은 확인될 테니 신청해 보라"고 했다. 하지만 가스 회사에선 "번호는 맞으나 신분증을 봐야겠다"며 "찾아 오라"고 했다. 짜증이 났지만 직접 갈 도리밖에 없었다. 그곳엔 20여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본 순간 "왜 백인은 한 명뿐이고 다 유색인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1시간쯤 지나고 차례가 와 여권을 제시하고 서비스를 신청했지만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요즘 미국 곳곳에선 '센센브레너 법안'으로 불리는 하원의 반(反)이민법안을 규탄하는 시위가 연일 벌어지고 있다. 그걸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비자가 있는 합법적 신분의 사람도 가스 하나 신청하는데 화가 날 만큼 불편을 겪었는데 불법 체류자는 무슨 일을 당하며 살까"라고.

미국 보수파가 불법 이민자를 강력히 단속하려는 데는 까닭이 있다. 그들은 불법 이민자가 많이 들어올수록 테러분자의 잠입 가능성도 커진다고 본다. 불법 이민을 방치했다가는 9.11 테러 같은 참변이 다시 일어날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그들은 또 불법 이민자가 국민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말한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불법 이민자 가족이 복지혜택을 받는 것도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안보와 국민경제를 걱정하고 대책을 모색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들의 방책이 비현실적이고, 비인도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미국엔 이미 1100만~1200만 명의 불법 이민자가 들어와 있다. 이 중 약 20만 명이 한인이라고 한다. 반이민법안은 이들을 모두 중죄인으로 몰아 형사처벌하고, 추방하려 한다. 이들을 고용하는 기업체와 도움을 주는 종교단체 등도 처벌하겠다고 한다. 이게 과연 가능하고 옳은 방안일까.

도대체 미국 당국이 무슨 능력으로 1000만 명이 넘는 불법 체류자를 가려내 처벌하고 쫓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실력이 있다면 불법 체류자가 그렇게까지 늘어났겠는가. 그들을 돕는 걸 처벌한다는 발상도 미국이 지향하는 가치인 인도주의에 어긋난다. 미국 등 여러 나라엔 '착한 사마리아인 법(Good Samaritan Law)'이 있다.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걸 장려하는 법이다. 센센브레너 법안은 그런 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그러니 "예수님도 죄인으로 만드는 법안"(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란 비판이 나오는 것 아닌가.

그런 법안을 상원 법사위가 수용하지 않고 독자적인 법안을 만든 건 다행이다. 불법 체류자에게 합법적 신분 획득의 길을 열어 준 것도 잘한 일이다. 하지만 상원 전체회의 심의, 상하 양원 협의과정에서 법사위 법안이 온전하게 유지될지 미지수다. 미국인이 존경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은 "우리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이 땅에 온 조상을 포함해 모두 이민자이거나 그 자손"이라고 말했다. 상하 양원의 의원들이 새겨둘 만한 명언이다.

이상일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