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부시의 '개종자 구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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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만을 위급 상황에서 구해 낸 건 미국이다. 특히 기독교도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역할이 컸다. 그는 22일 아프간 정부를 겨냥해 이렇게 말했다. "개종했기 때문에 처벌받는다는 얘기를 듣고 매우 유감스러웠다. 아프가니스탄이 종교의 자유라는 보편적 원칙을 존중하길 바란다."

다음날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부시 대통령의 지적을 반복하면서 라흐만을 살리라고 했다. 미국이 움직이자 유럽 국가들도 거들었다. 이후 아프간 분위기는 달라졌다.

라흐만 처형을 별렀던 검찰 쪽에선 갑자기"라흐만이 미쳤을 수 있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카르자이 대통령 측근은 "라흐만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다면 사건은 기각돼야 한다"고 했다. 법원의 결정은 그 말대로 이뤄졌다. 무슬림의 나라인 아프가니스탄에서 '법대로'를 외친 이슬람 지도자.신도들의 목소리가 무시된 모양새다.

라흐만 구명에 성공한 부시 행정부는 흡족해하는 모습이다. 라이스 장관은 26일 "아프간 소식이 사실이라면 그건 매우 좋은 진전"이라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는 라흐만 사건을 '민주주의 확산' 정책의 성공사례로 삼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민주화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슬람국가에서 종교의 자유를 관철했다고 자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도 돌아봐야 할 게 있다. 민주주의 전파라는 미명 아래 다른 국가의 내정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건 아닌지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부시 행정부가 탈레반 정권을 제거함에 따라 생긴 카르자이 정권은 미국의 우산 아래 있는 약자다. 그런 상대에겐 입김을 행사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프가니스탄의 민주화에 도움이 될까. 민주주의가 내정간섭으로 이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 아닐까.

이상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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