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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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집’- 김명인(1946∼ )

새집들에 둘러싸이면서

하루가 다르게 내 사는 집이 낡아간다

이태 전 태풍에는 기와 몇 장 이 빠지더니

작년 겨울 허리 꺾인 안테나

아직도 굴뚝에 매달린 채다

자주자주 이사해야 한재산 불어난다고

낯익히던 이웃들 하나 둘

아파트며 빌라로 죄다 떠나갔지만

이십 년도 넘게 나는

언덕길 막바지 이 집을 버텨왔다

지상의 집이란

빈부에 젖어 살이 우는 동안만 집인 것을

집을 치장하거나 수리하는

그 쏠쏠한 재미조차 접어버리고서도

먼 여행 중에는 집의 안부가 궁금해져

수도 없이 전화를 넣거나 일정을 앞당기곤 했다

언젠가는 또 비워주고 떠날

허름한 집 한 채

아이들 끌고 이 문간 저 문간 기웃대면서

안채의 불빛 실루엣에도 축축해지던

시퍼런 가장의

뻐꾸기 둥지 뒤지던 세월도 있었다


큰 수족관에서 심해어를 본 후로 나는 오래된 집을 ‘심해어 같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몸비늘의 문양은 꼭 오래된 집의 청태 낀 기와지붕 같았다. 나도 저런 집 한 채를 이 지상에서 빌려 살았으면 싶었다. 그 집에 세들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출가하고 그런 후에 너무 오래돼 아무도 그 집에 살지 않으려 할 때 비로소 내가 소유하게 될 집. 내가 죽으면 같이 허물어질 집.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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