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8. 악동 짓 완결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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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개성선죽초등학교 시절의 필자. 당시 뉴미디어인 라디오를 옆에 두고 사진을 찍었다.

일제시대 경기도 개성에 단 두 개의 유치원이 있던 시절 나는 중앙유치원을 다녔다. 또래를 휘어잡는 왈짜 노릇은 그때부터였지만, 악동 기질은 초등학교 무렵 본격화됐다. 4학년 때 마 선생님이라는 처녀 선생님이 계셨다. 그분이 오줌 누는 장면을 훔쳐보다가 된통 혼난 기억이 선하다.

어린 시절 추억의 하나이겠지만, 결국 나는 교무실에 불려가 한참을 무릎을 꿇어야 했다. 버릇은 점점 나빠졌다.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에게 따끔하게 매를 맞았던 적이 있었다. 마침 방과 후 음악실에서 혼자 풍금을 치시던 선생님을 발견했다. 순간 창가 커튼을 뜯어 선생님 머리 위에 덮어씌우고 마구 두들겼다.

큰 잘못이라는 것을 내가 왜 몰랐겠는가? 아직도 왜 그랬는지는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엄청난 일을 벌인 직후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쳤고, 선생님은 내 뒤를 쫓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급한 김에 운동장 포플러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까치집이 바로 코앞. 그러자 이번에는 선생님이 통사정이시다.

"동규야, 위험하니 내려와."

"선생님이 교무실로 가시면 내려 갈랍니다"

그 시절, 나는 여름철이면 동네 우물에 몰래 기어들어가 땀을 식혔다. 나만의 피서법이었다. 들킬 일도 없었다. 고려시대 돌우물의 5m 아래쪽은 컴컴했으니까 남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 두레박이 내려오면 제까닥 물을 담아 올려보냈다. 꾸중하는 동네 어른에게는 '귀여운 복수'도 감행했다. 한밤중 그 어른 집앞에 똥무더기를 쌓아 놓았다. 아침 첫걸음에 그걸 밟으시라고.

닭서리 정도야 예사였다. 개구리 새끼를 낚시줄에 끼어 넌지시 닭 앞에 던져주면 그것을 삼킨 닭은 퍼덕대며 나를 따라와야 했다. 그러다 6학년 당시 중3 세 명과 시비가 붙어 한꺼번에 두들겨줬는데 한 녀석의 이가 부러졌다. 그가 아버지를 앞세우고 쳐들어왔다. 나의 아버지 반응이 걸작이었다.

"이 못난 놈아 꼬마에게 얻어맞고 창피하지도 않아? 그리고 당신 말이야. 자식을 좀 씩씩하게 키워."

그날 아버지는 쇠고기 볶음을 잔뜩 먹게 해주셨다. 당시에는 대단한 특식이었다. 자, 오늘이 악동 짓의 마무리 편인데, 반세기 전 사회 분위기 한 토막을 전하고 싶다. 6.25 직전이던가? 주먹질 때문에 파출소에 끌려갔는데 형사가 나의 몸집을 척 훑어본 뒤 느닷없는 제안을 해왔다.

"나랑 붙어볼래? 네가 지면 단박에 영창이다. 단 네가 이긴다면 어떻게든 내가 석방시켜 주마."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져봐야 본전이니까. 경찰서 뒤뜰에서 맞붙었다. 그분은 유도를 했던 것 같고, 나야 레슬링을 배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씩씩 거리길 10여 분, 형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마디를 던졌다.

"짜아식, 운동했다는 얘기를 진작에 하지."

무승부 뒤에 내가 유야무야 풀려났음은 물론이다. 이승만 시절에 부패경찰도 많았겠지만, 인간적인 사건 처리도 흔했다. 어쨌거나 지나 간 일은 모두 아름답다. 나만 그런가?

배추 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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