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주먹과 김정은 악수서 고심하는 문 대통령

중앙일보

입력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일 청와대에서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전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일 청와대에서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전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북한의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전달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북 요청에 대해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켜 나가자”고 답했다. 이날 오후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방북) 수락이라고 볼 수 있다”고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불과 30여분 후 다른 고위 관계자는 “(문 대통령의) 발언 그대로 해석해 달라”며 신중한 태도로 한발 물러섰다. 남북 관계 진전을 한ㆍ미 관계와 맞물려 추진해야 하는 청와대의 고심이 드러난 대목이다.

 김 위원장이 여동생 김여정을 특사로 보내 남북 관계의 최고 이벤트인 정상회담을 사실상 제안하면서 한반도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주먹’과 김 위원장의 ‘악수’가 겹치는 현장이 됐다. 한ㆍ미동맹을 강건하게 유지하면서 남북 관계를 개선하는 이중의 과제가 청와대에 떨어졌다.
 앞선 두 차례의 정상회담은 모두 북ㆍ미 관계 개선이 선행된 뒤 성사됐다. 2000년 6월 김대중 전 대통령 때의 첫 회담을 앞둔 1999년 9월 미 행정부는 대북 제재 완화와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자제 등을 담은 ‘페리 프로세스’를 의회에 보고하며 북ㆍ미 관계가 해빙기에 돌입했다. 2007년 10월 2차 정상회담은 그해 미국이 동결했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BDA)의 북한 통치자금을 풀어주고 북한은 영변 핵시설의 가동 중단 등을 담은 ‘2ㆍ13 합의’에 도장을 찍으며 북ㆍ미 관계가 풀린 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일 백악관에 탈북자들을 불러 얘기를 듣고 있다.[백악관 영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일 백악관에 탈북자들을 불러 얘기를 듣고 있다.[백악관 영상]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선제타격까지 옵션에서 배제하지 않는 ‘최대의 압박’으로 나섰고, 김정은은 정상회담 제안이라는 ‘최대의 미소’를 보이며 마치 한국에 양자선택을 요구하는 모양새다. 트럼프 정부는 ‘비핵화 없는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원칙이 분명하다. 평창 올림픽 참석 차 방한을 앞둔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에 가라고 한 이유는 한ㆍ미ㆍ일 동맹 강화와, 북한이 핵무기 야욕을 포기할 때까지 계속되는 고립을 강조하기 위해”라고 단언했다. 펜스 부통령은 결국 북한 대표단과 접촉하지 않은 채 10일 출국했다. 청와대가 기대했던 북ㆍ미 조우는 이뤄지지 않았다.

 반면 우리 정부는 비핵화 목표에선 미국과 같지만 방법론은 보다 유연하다. 문 대통령은 지난 8일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남북 관계 개선과 한반도의 비핵화는 나란히 함께 갈 수밖에 없다”며 “우리 과제는 남북 간 조성된 대화 분위기를 어떻게 평창올림픽 이후까지 이어 가 북ㆍ미 간 대화로 발전시킬 것인가에 있다”고 강조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8일 평양에서 열린 건군절 열병식에서 참석했다.[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8일 평양에서 열린 건군절 열병식에서 참석했다.[연합뉴스]

 따라서 김정은의 방북 초청은 남북 관계만 놓고 보면 최상위 대화 채널을 구축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지만 비핵화를 향한 단초를 마련하지 않을 경우 한ㆍ미 간 이견을 야기하는 역효과를 부를 수도 있다. 결국 ‘비핵화 없는 북ㆍ미 대화는 없다’는 미국과 ‘비핵화 약속은 없이 남북 대화부터 하자’는 북한 사이에서 접점을 만들어 나가는 게 문 대통령의 숙제다.

 청와대가 생각하는 해법은 북ㆍ미 관계의 변화다. 문 대통령은 김여정 특사 일행에게 “남북 관계 발전을 위해서도 북ㆍ미 간의 조기 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미국과의 대화에 북쪽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고 강조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11일 “남북 관계의 드라이브만 걸면 북ㆍ미 관계가 따라가지 못할 수 있는 만큼 다양한 채널로 미국과 협의해 북ㆍ미간 기류가 변화하면 다시 남북 관계의 진도를 낼 것”이라고 알렸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미국은 남북 관계 개선이 비핵화에 도움이 될지 안 될지를 면밀하게 따지고 있을 것”이라며 “남북 관계 개선이 비핵화의 반대 방향이 아니라 비핵화를 위해 돌아가는 길임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채병건 기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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