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읽기] 영화의 살과 피에서 뽑은 ‘날것의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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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팩션시대, 영화와 역사를 중매하다
김기봉 지음, 프로네시스, 172쪽, 9000원

역사를 통한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
김기봉 지음, 푸른역사, 218쪽, 1만3000원

2년 전의 대박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대한 비평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내러티브(이야기)가 취약하다" "시대착오의 가부장적 질서를 형제애로 포장했을 뿐인 전쟁영화"…. 하지만 '팩션시대, 영화와 역사를 중매하다'의 저자인 김기봉 교수(경기대)에게 이 영화는 지난 해 나온'웰컴 투 동막골'과 함께 "탈 냉전적 시각으로 '국사'의 거대담론을 해체하는"데 성공한 (123쪽) 문제작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속에 두 주인공은 이렇게 항의한다. "형제 둘 다를 끌고가면(입대 시키면) 울(우리) 엄마는 누가 모실 수 있나?" 김교수는 국가 사랑이 형제애보다 중요하다는 '국민적 통념'은 근대 국가 출현 이후의 상황임을 귀띔해준다. 따라서 '태극기 휘날리며'는 국가가 일으킨 전쟁의 부조리를 표현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웰컴 투 동막골'역시 탈(脫)근대 사학의 문제의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동막골에 들어온 국방군.인민군에서 '미친 여자'여일에 이르는 '따라지 인생'들이 그걸 상징한다. 그들이야말로 서벌턴(subaltern)이다. 서벌턴, 민족.계급이라는 견고한 성곽에서 밀려난 하층민을 뜻한다. 그간 익명으로 남아왔던 이들이 역사서술의 새 주체라고 보는 게 요즘 역사학이다.

그 점에서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의 말대로 요즘 역사가란 비유컨대 흡혈귀다. 인간의 살냄새와 뜨거운 피를 찾아 헤메기 때문이다.(15쪽) 딱딱하고 식어버린 사실(史實)찾기에 여념이 없었던 옛날 역사가들은 중앙 권력자들이 남긴 뼈다귀만을 찾았던 '본 콜렉터(뼈 수집가)'인 셈일까? 따라서 이 책은 역사.영화 사이의 중매가 아닐지 모른다. '억압된 역사'를 말해온 영화.소설의 손을 번쩍 들어준 역설의 역사책이다.

술술 읽히는 이 책과 달리 '역사를 통한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는 좀 다르다. 동아시아 담론이라는 묵직한 이야기를 정공법으로 만진다.그러나'흡혈귀 역사학자'체취가 배어있어 지루하지 않다. 저쪽 유럽연합(EU)이 멋지게 굴러가는 이 판국에 동아시아 담론은 언제까지 당위론에 그칠 것인가. 어떻게 해야 국가.민족을 중심으로 한 동심원 그리기에서 벗어날까? 이런 문제다.

그가 제시하는 방법은 '역사를 통한'접근이다. 간단한 얘기다. 동아시아라는 장(場)을 중심으로 한 공통의 기억, 즉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공유 없이 여하한의 담론은 공허할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학교 교실에서부터 '배타적 국사'만을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는 제안도 함께 던진다."한국 역사학은 동아시아 관점을 공유하여 '동아시아학'이라는 새 학문 패러다임 정립에 이바지해야 한다"(201쪽)는 것이다. 두 책 모두 탈 근대사학의 입장에서 쓰여진 값진 저서들이다. 성균관대와 독일 빌레펠트대에서 신문화사와 탈근대사학 쪽을 전공한 저자의 입장이 썩 잘 드러난다.

조우석 문화전문기자

*** 바로잡습니다

3월 18일자 20면 '영화의 살과 피에서 뽑은 날것의 역사' 기사에서 책 '팩션시대, 영화와 역사를 중매하다'의 저자 김기봉 교수는 경희대가 아니라 경기대 교수이므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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