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쓰기 소송' 재판 없이 선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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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K판사는 지난해 5월 "법원이 경매를 잘못해 피해를 봤다"며 최모씨가 담당 법원 직원을 상대로 낸 19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하던 중 황당한 일을 겪었다. 최씨가 "재판 과정을 녹취했다"며 녹취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최씨가 그동안 법정에 녹음기를 몰래 갖고 들어왔던 것이다.

통상 2~3회의 재판을 거쳐 선고되는 다른 소액재판과 달리 이 재판은 최씨가 "증거 조사를 더 해야 한다"고 요구해 10차례나 열렸다. 해당 직원은 수년 전 최씨에 의해 고소돼 무혐의 처분을 받기도 했다. 최씨는 이에 불복해 헌법소원까지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K판사는 "이러한 떼쓰기식 소송의 경우 소송 상대편이 막대한 정신적 피해를 보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떼쓰기식 소송'을 막기 위한 대책이 본격 추진된다.

서울중앙지법은 앞으로 소송 청구액이 2000만원 이하인 민사 소액사건 중 이미 법원의 확정판결 또는 검찰 수사를 통해 진위가 가려진 경우엔 재판(변론)을 열지 않고 바로 선고키로 했다고 15일 밝혔다. 특히 적법한 국가기관의 직무에 대해 해당 공무원에게 소송을 제기할 경우 변론 없이 선고키로 했다. 예컨대 구청 등의 적법한 건축허가, 법원 판결,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해당 공무원을 상대로 소송을 내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이런 경우 소송 제기 후 1개월 내에 선고가 가능할 전망이다.

현행 소액사건심판법 제9조(심리 절차상의 특칙)에 따르면 법원은 소송 청구가 이유가 없는 게 명백한 때에는 변론 없이 청구를 기각할 수 있다. 일선 법원에선 그동안 이 규정을 활용하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변론 없이 서면심리를 거쳐 선고하게 되면 소송 상대편을 법정에 끌어내 고통을 줌으로써 스스로 정신적 위안을 얻는 '떼쓰기 소송'이 크게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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