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환, 새마을 7년(2)사조직으로 변한 「중앙본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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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청와대경호원으로 있다가 80년 경호과장으로 승진했던 전경환씨는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경호실보좌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전씨의 이 같은 승진은 국회의원에 출마하려는 집념으로 당시는 알려졌다. 그만큼 전씨는 국회 쪽에 강한 관심을 가졌으나 당시 주도세력들의 반대로 그의 출마는 좌절됐다. 그 대신 전씨는 81년 1월 느닷없이 민간주도 새마을운동의 실질적인 「총책」으로 발탁돼 부임했다. 그의 새마을참여가 순수한 새마을운동가들의 요청이나 추대·영입이 아니었음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된다.
그래서 전씨의 전격적인 사무총장 취임은 새마을 운동그룹의 입장에서는 「점령군의 진주」 같은 충격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80년 12월 김준 회장을 중심으로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발족한지 한 달도 훨씬 지나 81년 1월 전씨는 경호실에서 데리고 있던 비서 1명·여비서 1명을 데리고 당시의 서울 삼청동 임시사무실에 입주했다.
당시 삼청동 사무실에선 김준씨가 선발한 순수 새마을운동 출신 요원 5명이 창설작업을 진행중이었다. 미처 예산확보가 안돼 요원들은 두 달째 월급을 못 받으면서도 보람과 의욕에 넘쳐 뛰고 있었다.
초창기부터 「돈」도 「명예」도 아닌 「국민정신운동」을 삶의 보람으로 삼았던 이들은 새마을운동의 민간주도 새 출발을 직업적 타산을 뛰어넘는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전회장은 처음 와서 매우 솔직하고 겸손하려 애쓰는 인상이었습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모른다. 열심히 배워서 해보겠다. 그 동안 오래 새마을운동을 한 분들은 이제 힘이 빠졌을 테니까 새로운 사람들이 열심히 해보겠다」고 다짐을 하더군요. 그러나 기본적으로 새마을운동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요.』
창설요원으로 전씨를 지켜본 한 관계자의 증언.
전씨는 부임하자마자 자기 스타일로 일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새마을과 전혀 연고가 없는 주변사람들을 본부에 끌어들였다.
발족 당시 2실 5부 11과의 본부기구는 인선이 되지 않은 채 대부분 비어있었다.
전씨는 이 자리에 자기사람들을 앉혔다.
부임 직후 육사출신 박용규씨를 기획실 차장으로, 해병장교출신인 김승택씨를 지도부장으로 발령하는 등 새마을본부는 전씨의 사조직으로 형성돼갔다.
전씨가 끌어들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전씨가 근무했던 수경사·경호실 등 군 출신, 연고지인 경남 합천·대구지역 출신 동창·선후배와 인척, 전씨가 다닌 국교·중고교·대학친구들.
99% 새마을과 무관한 이들이 중앙본부 조직을 장악하면서 본부 분위기와 새마을운동의 방향은 어느새 변질됐다.
「국민정신운동」이 아니라 「사업행사기구」로 바뀌어간 것이다.
그와함께 순수 새마을운동 출신들은 본부운영에서 소외되고 두 그룹·노선간의 갈등은 새마을운동을 내부에서 멍들게 했다.
순수 새마을출신들은 80년 이후 새마을운동은 「민간주도」가 아니라 「군 주도」였으며 중앙본부는 새마을운동본부라기보다 전경환 사업본부였다고까지 비판한다.
전씨는 자기사람으로 조직을 채우는 한편으로 대대적인 조직확대, 쉴 새 없는 행사사업추진에 나섰다. 불과 6년 2개월만에 본부는 2실 5부 11과 1백37명 직원이 1실 6부 32과 1천3백72명으로 10배나 팽창했다. 그리고 1천억원이 넘는 집행예산은 모두가 국민의 세금인 국비·지방비 그리고 각계의 「성금」이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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