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소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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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진우 (1960~ ) '소음' 부분

나도 모르게
벌집을 건드렸나보다
붕붕거리며 날아오른 벌들이 사방에서 나를 에워싼다

발을 디뎌서는 안 될
금지된 영지를 침범한 것일까
늙은 떡갈나무 아래를 지나다 무심코
머리 위로 손을 뻗치는 순간
먹구름처럼 모여드는 벌 소리와 함께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수많은 말들이 거침없이 나를 찔러대며
어서 무릎 꿇으라고 잘못했다고 빌라고 다그친다
퉁퉁 부어오르는 살 위에 다시 침을 박는다

개울을 건너 풀숲을 헤치고
아무리 멀리 달아나봐야 소용없다



오래 전에 본 영화 '지난 여름 갑자기'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태양이 지글거리는 여름날, 이방의 언덕에 아이들이 빙빙 돌며 괴상한 소리를 지른다. 그 소리에 포획되어 온몸을 뒤틀던 여주인공의 얼굴…. 벌집을 건드린 듯 소음에, 아니 소문에 꼼짝없이 둘러싸여 있는 삶. '벌(蜂)이야/ 벌(罰)이라니까'. 이 시의 끝 구절이다.

문정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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