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 창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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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바우- (뿌리치며) 니놈이나 많이 마시고 불로장수하거라.
땅꾼-아, 내가 어디 험한 암 먹고 그런 소리 했간디? 다 손주님 명줄 길어지라고 그랬지.그러니자…. (바우를 좌대에 끌어다 앉힌 후 잔을 내밀며) 뭐니뭐니해도 힘이 제일인기라. 이제는 즈이 애비를 때려 눕혀 놓고도 「힘이 보배로다」하는 세상이 되어 뿌린기라! 그라고, 힘쓰는데야 이 살모사 덮을 거이 워디 있간디요? (바구니를 툭툭 쳐 보이며) 지 에미 배가르고 나온다는 살모사 아니겠어라오? 요놈 한 마리만 푹 고아먹었다 하면 손주님도 거뜬히 털고 일어날팅께 자 한잔 쭉 드시더라고.
바우- (말없이 잔을 받는다)
산네- (발작적으로) 묵지 마라!

<바우와 땅꾼, 문득 산네를 쳐다본다>
산네- (부르짖듯) 독이다!
땅꾼- (씩 웃으며) 이게 독이면 산삼은 비상이겄네? (바우에게)자, 드시쇼. 쓰잘데기 없는 소리 들을 것 없어요.

<바우, 잔을 받아 입으로 가져간다. 그러자 산네가 달려 들어 술잔을 털쳐 버린다>
산네- 공들인다 카면서 술은 무슨 술이고?

<바우의 눈동자에 일순 분노의 그림자가 스쳐간다. 그러나 애써 참는다. 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 산네, 적삼 자락으로 바우의 젖은 무릎을 닦아준다>
산네- (타이르듯) 술먹지 말거라. 총기 없어진다.
땅꾼- (다시 술을 따르며) 허, 술이사 취할라꼬 마시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며) 가만있자, 60에 총기라?…. (바우를 쳐다보며) 아니 영감, 총기라니, 대체 누구 총기 말이요?
산네- (땅꾼을 흘겨보며) 니 알 것 읍다. 아부지 같은 어른한테. 영감이 뭐꼬?
땅꾼-허, 영감이사 지체 높은 어른이제? (문득 생각하다가) 아니, 그런데 이 여자가 졸지에 산정기 탔네? (산네에게 다가서며) 보소, 산주 아짐씨. 남들이 돌았다, 돌았다 하니깐두루 화딱지나서 제자리로 돌아와 뿌린기요?
산네-남이사 돌았거나 미쳤거나 니 알 바 읍다. 이 산에는 뱀이 없으니 자취없이 사라지거라!
땅꾼-하이고오, 아짐씨. 내가 어디 비암 잡아서 떼돈 벌려고 이 산에 오는 줄 아시오? (더 바싹 다가서며) 나는 마 이 산이 좋아서….
산네- (물러서며) 다 안다. 니 시꺼 먼 뱃속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땅꾼-알아주시니 고맙구만이라오? 나는 마, 고놈들이 엉뚱한 구멍으로 대가리 처박고 꾸물딱거리며 들어갈까 봐서….
산네-밤낮 기웃거려봐야 어림 읍다. 방문 안으로 걸어 잠그고 잔다!

<그때, 멀리서 개 짖는 소리. 땅꾼, 저도 모르게 움찔한다>
산네- (못을 박듯) 저놈들 우쩨 됐다 카면 당장 니놈 짓인 줄 알끼다!
땅꾼- (발끈해서) 아니, 산주 아짐씨. 말이면 다 하는 줄 아시요? 내가 아무려면 개한테다….
산네-안오면 될 거 아니가? 안오면 이런 소리, 저런 소리 안 듣게 될 거 아니가?
땅꾼-나 원. 살다가 별 걸레 쪼가리 같은 소리 다 듣겄네. 이 아짐씨야, 나도 고향 가면 집 있고 논밭전지 있는 사람이여. 이거, 왜 이러실까, 정말? 이것 보더라고, 아짐씨. 땅꾼 노릇한다고 이렇게 함부로 씹어 뱉어도 되는 거여? 자고로,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살랬다고….
산네-정승 못 되게 한 사람 여기 읍다! 정승이 되든지 개백정이 되든지 내 눈앞에서 없어지기만 해라! 그라고, (바우를 쏘아보며) 영감씨도 또 술 마실라 카모 당장 보따리 싸시요!
바우- (귀가 번쩍해서) 앙이 뭐라꼬? 그라모, 술만 안 마시모 저거 세우라고 허락해 줄끼가?
산네-………. (계속 노려볼 뿐)
바우-그렇다 카모 안 마시지러! 술 없는 동네에서도 살기만 살았다!
산네- (이윽고) 이 소리, 저 소리 더 들을거 읍다. 모두 내 눈앞에서 없어지거라! (휙 몸을 돌려 산아래 쪽으로 내닫는다)
바우- (그 뒷모습을 이윽히 바라보고 있다가) 인간 덜된 것들이 산네보고 모자란다 카제.산네는 멀쩡한기라…. (담배를 꺼내 물며)산 들어먹을라꼬 넓죽거리는 놈들 꼬라지 보기 싫어서 일부러 미친 척 하는 기라….
땅꾼- (산을 둘러보며) 하기사, 요런 산 하나만 있으면 헌 정승 부럽잖제.
바우-만석꾼도 망할려니 하루 아침이더라. 인간이 제일이제. 돈 해 뭐할 끼고….
땅꾼-아니 그럼, 저런 소박데기를 그냥 데려가란 말이요?
바우-산네가 와 소박데기고? 서방이 산 팔아서 서울 가자는거 뿌리친 것 뿐이지.
땅꾼- (잠시 생각하다가) 둘러치나 메치나 그게 그거여. 남의 일 상관말고 우리는 술이나 마십시다?
바우-자네나 마셔.
땅꾼-아따. 말이사 바른 말이지, 저거 세운다고 골골하는 손자가 기운 차리겄소? (술을 따르며) 영감사업 망치고 자식들 앞세운 것하고 저놈의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단 말이시. 자, 이 술이나 드시오. 다듬어 세운 것도 인간이고 찍어 넘긴 것도 인간이란 말이시.
바우- (말없이 땅꾼을 내려다본다. 망치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간다)
땅꾼-영감, 저거 세워서 가문 일으키려 할게 아니라 비암을 드쇼, 비암을. 거기에 힘이 있어사 실한 자식을 낳을 것 아니요? 내 말 틀렸소?,
바우- (계속 노려본다)
땅꾼-아,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거딴거나 다듬고 있다요? 그것 안허고도 주사기로 물 받아 새끼 낳고 수술해서 키도 잡아 늘리는 세상인디.
바우- (어금니를 부드득 갈아문다)
땅꾼-그래, 저것만 세우면 손자 병이 천리만리 도망을 치고, 부귀영화가 벼락치듯 달려온답디까? 인간사. 공들인다고 뜻대로 될 것 같으면 세상에 망할 놈 한 놈 없게? 이것 보시더라고, 나도 우리엄니 백일기도 드린 끝에 세상 구경한 놈이요. 우리 엄니 찬물에 목욕하고 부처님께 치성드릴 때, 땅꾼 자식 낳게 해 달라고 빌었겄소? 잘 돼도 지 팔자, 못 돼도 지팔자…. 복대로 사는 거란 말이요.

<술잔을 비운 땅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바우-(쳐다보며) 어디 갈라카노?
땅꾼-기다리시쇼. 가서 산나물 무친 거라도 좀 얻어 올팅께.
바우-그냥 마시거라. 여자 혼자 사는 집 기웃거리지 말고. 니가 언제는 안주 갖추어서 술 마셨나?
땅꾼-이거 왜 이러쇼? 내가 뭐 산네한테 흑심이라도 품은 줄 아쇼?
바우-아니면 그냥 마시거라.
땅꾼- (씩 웃으며) 영감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드시오. 죽어지면 썩어질 몸,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안 봐주면 저 남근상이 봐 줄겨?
바우- (막아서며) 못간다!
땅꾼-걱정도 팔자셔. 싫다는 년 억지로 가랑이 벌리게 하지는 않을 팅게 염려 놓으시더라고!
바우-못간다면 못가!
땅꾼-아니 영감, 먹여 보지도 않고 식충으로 몰 작정이오? 싫은데 가랑이 벌릴 여자는 아니니, 소리칠 때 내려와도 늦지는 않을거요.

<땅꾼, 내려 간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섰던 바우, 망치와 끌을 찾아 드는데 숲속에서 산네가 튀어 나와 바우의 등에 달라 붙는다>
산네-안된다!
바우- (반가와서) 아니, 니 집에 안가고 어디 있었디노?
산네-흥, 누가 그 놈 속 모를까봐?
바우-그래 맞다. 주는 거하고 뺏기는 거는 다르제? 조심하거라. 잘 때는 문단속 잘 하고.
산네- (속삭이듯) 걱정 말거라. 우리 누렁이하고 검둥이는 그 놈만 보면 사생결단인기라!
바우-그래도 조심해야제. 열 사람이 지켜도 하나 도둑 못 잡는다는 말이 있니라. (다시 일을 시작하려 한다)
산네- (더 매달리며) 못한다!
바우- (타이르듯) 물러나거라. 나는 말이다, 죽기 전에 꼭 해야 되는기라….
산네-죽기는 와 죽노? 안 죽으모 될거 앙이가?
바우-사람이 우째 안 죽노? 내 손으로 찍어 넘긴거 내 손으로 다시 세워야 하는 기라. 그래야 조상을 만나제. 저거 덕분에 대대손손 영화 누리고 살았는데 내 손으로 찍어 넘긴지 삼심년이니….
산네-그래도 안 된다. 죽어도 못한다.
바우-봐라, 산네야. 적선하는 셈 치거라. 내 꼬라지가 불쌍하지도 않으나? 그 많던 재산 다 날리고, 자식 앞세우고…. 이제 남은 거는 손자 하나뿐이다. 그러니 제발….
산네- (바우 앞으로 와 서며) 내 땅이다. 내 땅에 있는 거는 몽땅 내꺼다.(산을 휘둘러보며) 자, 봐라! 나무도 내꺼, 바위도 내꺼, 물도 내꺼, 몽땅 내꺼다. 그래도 세울라나?
바우-산은 니꺼지만 저거는 앙이다!
산네-앙이다! 이 산에 있는 거는 전부 내꺼다. 신령님 은덕도 내꺼고 저거 정기도 내꺼다!
바우- (화가 나서) 이년아, 물건 보니까 탐난다 이거가? 그렇게 좋거든 땅꾼꺼라도 해라. 이거는 안된다!
산네- (픽 웃으며) 내가 바본 줄 아나? 바보라서 여태까지 저거 그냥 둔 줄 아나? (남근상 앞으로 다가서며) 이거 정기는 내가 받을끼다. 이거 정기로 삼정승 육판서 낳아 이 세상 덮을 끼다. (남근상을 쓸어 안으며 볼을 비빈다)
바우- (발을 구르며) 저런 도둑년! 안되면, 처음부터 안된다고 할거지.
산네-긴 말 할 것 읍다. 그래도 세울라나? 대답해라.
바우-………. (바라볼 뿐)
산네-우짤래? 대답해라!
바우-……….
산네-싫으면 보따리 싸거라!
바우-……….
산네-대답해라. 내꺼가, 앙이가?
바우- (이윽고) 우쨌기나 세워 놓고 보자.
산네-그거는 안된다. 대답부터 해라.
바우- (도리없이) 그래, 니꺼다.
산네-신령님이 듣고 계신다!
바우-……….
산네-신령님한테 맹세해라!
바우-……그래, 니꺼다.
산네- (득의만면해서 비켜서며) 끌질해라!
바우- (움직이지 않는다)
산네-치마 걷어라. 부정시럽다!

<천천히 남근상 앞으로 다가선 바우, 치마를 걷는다. 남근상이 드러난다. 영락없이 남근이다>
산네-뭐 하노? 빨리 끌질해라.
바우- (움직이지 않는다)
산네-빨리 해라. 해 잡아 묶어 놨나?
바우- (이윽고 끌질을 시작한다)
산네-잡념 버려라! 정성이 제일이다.
바우- (계속 끌질 한다)
산네-팔에 힘 줘라. 힘줄이 불끈불끈 돋아나게 쪼아라.
바우-……….
산네-오늘부터는 우리집에 와서 자거라.
바우- (문득 돌아본다)
산네-찬 데서 자면 힘 못 쓴다.
바우- (다시 끌질을 한다)
산네-정성이 제일이다. 아침마다 정수로 목욕하고 신령님께 인사 올리거라.
바우- (계속 끌질한다)
산네-이 산 정기 몽땅 모아서 쪼아라. 그라면 산도 일읍다!
바우- (다시 돌아본다)
산네- (독백처럼) 인간이 제일이제. 자식 없는 년이 산은 해서 뭐 할끼고?

<바우, 일손을 놓는다.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데 요란히 개 짖는 소리>
산네- (산 아래 쪽을 흘겨보며) 이놈아, 오늘이 바로 니 제삿날이다!

<개 짖는 소리 더더욱 격렬해진다>
바우- (산 아래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혼잣말로) 저놈들이 못볼 것을 봤나?,
산네- (회심의 미소를 띠며) 어디 한 번 실컷 뜯겨 봐라. 누렁이하고 검둥이가 장히 그냥 보내 주겠다!
바우- (산네를 쳐다보며) 땅꾼 앙이가?
산네-개보다 못한 놈이다!
바우-무슨 소리고? (뛰어 내려가려 한다)
산네- (막아서며) 일부러 풀어 놨다! 밤마다 얼씬거리는 기라!

<이윽고 비명소리 잦아진다>
산네- (픽 웃으며 혼잣말로) 이왕이면 그걸 콱 물어 뜯어버릴끼제.
바우- (흘기며) 못쓴다. 그기 근본인데….
산네-근본도 근본 나름이다!
바우- (좌대에 털썩 주저앉으며) 인연은 모르는기다. 사내가 한번 작심을 했다 하면 계집은 요지부동인기라.
산네- (입을 삐죽하며) 내 목에 칼을 들이대 봐라, 그놈의 씨를 받는가!
바우- (따지듯) 와, 땅꾼이 어때서?
산네-살림에는 눈이 보배라 캤다!
바우-이것아, 메뚜기도 한 철이라 캤다. 니가 매양 피둥피둥할줄 아나?
산네-걱정 말거라. 내 자궁들이 이세상 뒤덮을 끼다.
바우- (비꼬듯) 하늘을 봐야 별을 따제?
산네-니는 끌질이나 열심히 하거라. 별은 벌써 옛날에 내 품안에 들었다.
바우- (기웃이 산네를 들여다보다가) 니, 좋은 놈, 따로 있는 거 앙이가?
산네- (정색하며) 그래, 있다.
바우- (놀란다) 누고? 그기 누고 말이다.
산네- (빤히 바우를 쳐다보다가) 니다!
바우-뭐라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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