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미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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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태국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무앙타이」라고 부른다. 「타이」는 자유,「무앙」은 국가, 곧「자유의 나라」라는 뜻이다.
태국사람들의 선조는 원래 중국화남지방에 살았다. 이들이 7, 8세기 무렵 남하해 메콩강 서쪽에 정착했다. 이곳엔 이미 소삭부족들이 벼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14세기 그 부족가운데 하나인 샴족이 메남강 유역에 살고 있는 크메르족을 누르고 아유티아왕조를 세웠다.
이때부터 여러 부족 사이에 관용과 평등, 평화를 존중하며 자유를 누린다는 뜻으로 종족명을「타이」라는 말로 통일했다.
바로 그「자유의 나라」에 혁명이 연례행사처럼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타이」는「혁명의 자유」라는 말인가.
1932년 전제 군주제에 불만을 품은 인민당이 무혈혁명을 일으켜 입헌군주제를 세운 뒤 반세기를 지내오며 무려 15차례의 쿠데타와 쿠데타 미수가 있었다.
근년의 마지막(?) 쿠데타는 77년10월 군부혁명단이 일으켰다. 「민정4년」만의 재판 쿠데타였다.
그 후 81년 젊은 장교들이 일어나 수도 방콕을 장악했다. 그러나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실패의 원인은 두 가지. 하나는「푸미폰」국왕이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그들 젊은 장교를 지지하는 정치세력도, 국민도 없었다.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그것이 군부 핵심세력의 봉기가 아닌 한, 어느 구석에든 심정적으로라도 지지 세력이 있어야 한다.
그 후 4년만에 다시 시도된 쿠데타도 역시 실패로 끝났다. 4년전 쿠데타를 기도했던 영관급 강경파 장교들의 모사.
때마침 국왕은 지방 순시중, 수상「프렘」은 인도네시아 방문중, 군총사령관「아르티트」장군은 스웨덴 외유중이었다. 권력의 중추가 국내에 없는 상황에서도 탱크를 몰고 나왔던 무리들은 투항하고 말았다.
역시 명분 없는 거사가 제일 큰 약점이었던 것 같다. 더구나 태국은 지금 3대 정당이 야합, 일종의 연정을 세우고 있어서 태국 군부의 정치개입은 년년 약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83년 거부의 개헌요구도 3당 연정을 낳은 총선결과로 무산되고 말았다. 군은 상원(임명제·80%가 군부세)의 정치력 강화, 군의 각료취임 허용을 골자로 한 개헌안을 내놓았었다.
게다가 정부는 지금 경제성장의 야심을 담은 6차5개년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국민들은 쿠데타에 식상할 만 도하다.
결국 그런 복합 요인이 쿠데타기도를 밀어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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